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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토맹하(赤兎孟夏)
관리자
2024.03.09
53
적토맹하(赤兎孟夏)
옛 사람들은 멋을 많이 부린다. 위의 제목처럼 ‘붉은 토끼’라느니 ‘맏이 여름’과 같이 말이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하권에 ‘금마인아선범패성’ 조항에는 범음종보의 범음족파서가 나오는데 그 서문을 쓴 이는 용암증숙인데 글 쓴 시기를 위의 제목처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역주조선불교통사』에서는 “붉은 달 더운 여름에”(4권 506)라고 번역해놓고 있다. 해와 달의 표기를 이렇게 추상적으로 옮겨놓았다. 모르긴 해도 이렇게 번역하고 자신은 대단한 번역을 하였다고 자부했을 것이다. ‘赤兎: 붉은 토끼’는 ‘정묘년(1747)’을 지칭하고 ‘맹하: 맏이 여름’은 여름의 첫째 달[4월]을 표현하는 말이다.
동아시아에서 인문학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한자, 한문을 익혀야 한다. 그래야 글을 제대로 읽고 쓸 수 있다. 조금 아는 지식으로 학자 노릇을 하면 후학에 부끄러움이 된다. 불교와 불교의례 관련 글월에서는 이것보다 더한 것이 많다. 독자들 이전에 자기 자신에 정직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모를 수 있다. 그렇지만 전후 맥락을 잘 파악하고 깊이 사유하면 글 쓴 이의 마음이나 심정을 어느 정도 만나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실수를 줄일 수 있다. 어제는 공부하는 어느 분이 천수경 광본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현재의 천수경은 약본이라고 하면서 어느 스님이 그랬다는 것이다.
기가 막혔지만 설명을 했다. 천수다라니를 염송하는 의궤가 현행 천수경 앞부분인데 의례의 형태와 함께 합해진 의궤가 된 현재의 현행 천수경이 약본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천수다라니를 염송하는 의궤를 간략한 의궤나 좀 더 복잡한 의궤로 편제해놓으면 약본이니 광본이니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에 광략본이 있다고 주장하니 슬펐다. 공부하지 않고 아는 척하다 보면 그렇게 된다. 대충 알고 아는 척을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의학(義學)을 정의로운 학문이라고 해도 좀 그렇다. 의학은 선학에 대한 교학을 지칭한다. 정의를 잘 찾는 것이니 정의로운 학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대의 ‘정의(justice)’와 약간의 차이가 있으므로 구분될 필요가 있다.
전문적인 분야를 잘 모르고 아는 소리를 하는 것은 불교를 하는 이로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전문적인 것일수록 발언하거나 글 쓸 때는 전후 맥락과 역사와 상황 등을 두루 살펴 비교적 논리적으로 확증이 되는 것을 발언하고 글로 표현해야 한다. 그럴듯함에 속는 것은 지혜로운 이가 아니다. 공부하는 목적은 바로 알기 위해서이다. 여실정견을 갖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금강경 지견불생(知見不生)분에 대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라고 번역한다. 여기서 지견은 알음알이가 아니라 이렇게 바로 알고[如是知] 이렇게 바로 보고[如是見] 하여 법상조차도 내지 않는다[不生法相]는 본문 구절에서 채자한 것이 분명하다. 여실지견을 뜻하는데 그걸 알음알이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다. 그렇게 ‘큰스님’, ‘작은스님’ 가릴 것 없이 그렇게 번역하고도 잘 번역했다고 이해한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 나도 잘 못 보고 글을 쓸 때가 적지 않다. 잘못을 알았으면 얼른 수정해야 한다. 잘못을 하고도 잘못을 한 줄도 모르거나 빡빡 우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내가 ‘나모’와 ‘귀의’가 다르다고 주장해온 지가 오래되었는데 다 그게 그거라고 하면서 구분하지 않고 ‘나모’를 ‘귀의’로 번역한다. 전공학자도 마찬가지이다. 같으면 다르게 표현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다르게 표현하는 것은 의미가 달리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미와 문예미를 알아야 다른 이들의 글말의 본 의미를 조금이라도 덜 놓친다. 지견이 늘면 머리가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맑아지고 헤매지 않는다.
빠라미따
2024.03.09. 13:35. 牛辿
옛 사람들은 멋을 많이 부린다. 위의 제목처럼 ‘붉은 토끼’라느니 ‘맏이 여름’과 같이 말이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하권에 ‘금마인아선범패성’ 조항에는 범음종보의 범음족파서가 나오는데 그 서문을 쓴 이는 용암증숙인데 글 쓴 시기를 위의 제목처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역주조선불교통사』에서는 “붉은 달 더운 여름에”(4권 506)라고 번역해놓고 있다. 해와 달의 표기를 이렇게 추상적으로 옮겨놓았다. 모르긴 해도 이렇게 번역하고 자신은 대단한 번역을 하였다고 자부했을 것이다. ‘赤兎: 붉은 토끼’는 ‘정묘년(1747)’을 지칭하고 ‘맹하: 맏이 여름’은 여름의 첫째 달[4월]을 표현하는 말이다.
동아시아에서 인문학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한자, 한문을 익혀야 한다. 그래야 글을 제대로 읽고 쓸 수 있다. 조금 아는 지식으로 학자 노릇을 하면 후학에 부끄러움이 된다. 불교와 불교의례 관련 글월에서는 이것보다 더한 것이 많다. 독자들 이전에 자기 자신에 정직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모를 수 있다. 그렇지만 전후 맥락을 잘 파악하고 깊이 사유하면 글 쓴 이의 마음이나 심정을 어느 정도 만나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실수를 줄일 수 있다. 어제는 공부하는 어느 분이 천수경 광본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현재의 천수경은 약본이라고 하면서 어느 스님이 그랬다는 것이다.
기가 막혔지만 설명을 했다. 천수다라니를 염송하는 의궤가 현행 천수경 앞부분인데 의례의 형태와 함께 합해진 의궤가 된 현재의 현행 천수경이 약본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천수다라니를 염송하는 의궤를 간략한 의궤나 좀 더 복잡한 의궤로 편제해놓으면 약본이니 광본이니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에 광략본이 있다고 주장하니 슬펐다. 공부하지 않고 아는 척하다 보면 그렇게 된다. 대충 알고 아는 척을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의학(義學)을 정의로운 학문이라고 해도 좀 그렇다. 의학은 선학에 대한 교학을 지칭한다. 정의를 잘 찾는 것이니 정의로운 학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대의 ‘정의(justice)’와 약간의 차이가 있으므로 구분될 필요가 있다.
전문적인 분야를 잘 모르고 아는 소리를 하는 것은 불교를 하는 이로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전문적인 것일수록 발언하거나 글 쓸 때는 전후 맥락과 역사와 상황 등을 두루 살펴 비교적 논리적으로 확증이 되는 것을 발언하고 글로 표현해야 한다. 그럴듯함에 속는 것은 지혜로운 이가 아니다. 공부하는 목적은 바로 알기 위해서이다. 여실정견을 갖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금강경 지견불생(知見不生)분에 대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라고 번역한다. 여기서 지견은 알음알이가 아니라 이렇게 바로 알고[如是知] 이렇게 바로 보고[如是見] 하여 법상조차도 내지 않는다[不生法相]는 본문 구절에서 채자한 것이 분명하다. 여실지견을 뜻하는데 그걸 알음알이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다. 그렇게 ‘큰스님’, ‘작은스님’ 가릴 것 없이 그렇게 번역하고도 잘 번역했다고 이해한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 나도 잘 못 보고 글을 쓸 때가 적지 않다. 잘못을 알았으면 얼른 수정해야 한다. 잘못을 하고도 잘못을 한 줄도 모르거나 빡빡 우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내가 ‘나모’와 ‘귀의’가 다르다고 주장해온 지가 오래되었는데 다 그게 그거라고 하면서 구분하지 않고 ‘나모’를 ‘귀의’로 번역한다. 전공학자도 마찬가지이다. 같으면 다르게 표현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다르게 표현하는 것은 의미가 달리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미와 문예미를 알아야 다른 이들의 글말의 본 의미를 조금이라도 덜 놓친다. 지견이 늘면 머리가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맑아지고 헤매지 않는다.
빠라미따
2024.03.09. 13:35. 牛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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