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공지
그릇의 차이
관리자 2024.01.13 39
그릇의 차이
 
지혜가 좀 적은이나 그렇지 않은 이나 비슷한 안목으로 사태를 대처할 때가 있다. 양태가 표면화 되었을 때는 특히 그렇다. 사태가 분명하니까 어느 정도 그 의미를 알아차린다. 이를테면 동물적으로 알 수 있을 때일 것이다. 
 
그렇지만 다 그렇지는 않다. 리더나 노련한 동물들을 인간들을 따돌릴 때는 지혜의 차이가 적지 않다. 동물도 이럴진대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간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릇의 차이는 알아차림의 지혜와 직결된다.
 
그런데 소주잔 같은 작디작은 잔으로 바다물같이 많은 물을 퍼내려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당연 불가능하고 멀지 않아 지치게 된다. 굳이 언급될 만한 이야기가 못 되지만 언급하는 것은 그만큼 다룰 가치는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신이라는 그릇의 크기를 알아차리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좁쌀 만한 마음 그릇을 가진 이가 그 관견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정의를 외치며 진리를 논한다고 생각해보자.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달리 무지무지한 살인도가 될 수 있다.
 
 관견을 가진 이가 휘두르는 살인도는 세상과 대상을 죽인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넓은 안목을 가진 이들의 현상 너머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읽어낸다. 그러므로 현상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진정 지혜 있는 이는 목전의 양태에 호불호하지 않고 인연을 살펴보므로 터무니없이 오판하는 일은 드물다. 그릇의 크기는 현상만을 보느냐 그 본질까지 볼 수 있느냐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자신을 잘 보기는 어렵다. 
 
결국 인간이라는 도량의 그릇 크기는 안목이고 수용이다. 첫째는 안목에서 크기를 볼 수 있고, 수용에서 두 번째 그릇의 크기를 잴 수 있다. 만일 다른 소리 하나 수용해 못하거나 이익을 능력이라면 독차지하는 이의 그릇은 크다고 볼 수 없다.
 
스스로 좁쌀 같은 그릇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을 바로 볼 수 없다. 미친년 널뛰듯이 여기저기 쏘다니며 이일저일 일 만들고 말 만들고 다니며 남녀승속을 막론하고 큰 그릇이 되기 어렵고 세상의 빛이나 소금이 되기 어렵다. 
 
그릇의 차이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나만을 위해 사느냐, 남들과 같이 살아가려고 하느냐 하는 데에서 판가름 난다. 살인도를 쓰느냐, 활인검을 쓰고 있느냐. 이것도 제 깜냥으로 착각하지만 이것은 지혜 없어도 선천적으로 다 안다.
 
그릇은 키우기 힘들다. 오랫동안 존재들은 자신이나 가족만을 위해 살아왔기 때문이다. 관견으로 자신의 행동이 불교나 나라를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애국이나 애종은 그릇이 크지 않고는 의도와 달리 반대로 결과가 나타난다.
 
토요일 오후만 되면 서재 주변은 교통혼잡으로 홍역을 치른다. 나라를 구하자고 하면 극렬 보수주의자들이 험한 말을 쏟아내고 극렬진보주의자들이 일자리를 외치며 보신각 광화문에서 시위를 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이 애국 애종이라고 하는 이들은 대개 관견을 가진 이들이다. 이들이 멋 모르고 휘두르는 살인도에 애꿉은 이들이 다친다. 철없는 아이들이 던져되는 돌맹이가 존재보다 더 무섭고 더 더럽다. 
 
그릇을 키우는 것은 보리심을 키우는 것이다. 지혜를 개발하면 일체 존재의 진상이 드러나고 그것의 불이와 공을 깨닫게 된다. 자연 지혜가 나오고 넓은 안목과 도량이 생긴다. 그렇게 되면 본질이 잘 드러나고 충만한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된다.
 
2019.12.10.06:36.
 
0 개의 댓글
(댓글을 남기시려면 사이트에 로그인 해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