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공지
우리가 좋아하는 불교가 세상에 영속하게 하려면
관리자 2024.01.13 37
우리가 좋아하는 불교가 세상에 영속하게 하려면
 
정치적 견해인 진보와 보수가 때로 일상까지 나누고 있다고 보입니다. 상대 진영의 타자를 극도로 부정하고 조롱하는 것이 우리네 삶을 장식하고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좌우의 대립과 육이오라는 민족상쟁의 아픔은 근원적으로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장 우리네 삶을 진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행위들은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는 반대와 지지 속에 외형상으로는 대중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종교는 권위와 실체라는 환상으로 공고한 성을 쌓곤 합니다. 절대주의 종교일수록 더욱 심한 것 같습니다. 일체의 정치나 종교는 세상의 지지와 봉사와 헌신 속에 성립됩니다. 지지와 봉사와 헌신을 한 이들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것은 차치하고 뒤에서는 그들을 억압하고 바보 취급을 아주 쉽게 합니다. 하느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헌신을 강요하거나 고통받는 범부중생이라고 하며 그들의 우치를 인도한다는 명목으로 그들 위에 군림합니다.
 
 불교를 좀 아는 사람들은 우리도 붓다처럼 살기를 외칩니다. 그리고 붓다 당시의 순수한 불교하기를 희망합니다. 지난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으나 그 외침은 공허한 염불에 그치고 말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불교를 믿는 것은 다 붓다의 깨달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의 위대한 정신과 수행력이나 그 깨달음의 가치가 우리를 해방이라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우리는 불교를 믿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나 종교나 사회에 바람직한 이상과 달성방법을 제시하므로 다 정치행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고 따르는, 우리를 대신하여 그 선두에 선 이들을 향해 지지하고 성원합니다. 그리고 그 가치가 정치적으로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직접 정치 일선에 나서지 않더라도 우리를 대신해서 정치하는 이들을 위해 우리는 지지와 성원을 하므로 대의자들의 성공은 우리의 성공과 동일시합니다. 우리의 성공을 위해서는 우리의 가치에 지지를 보내는 이들이 많아야 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정치이든 종교이든 그들을 따르고 지지하는 이들을 넓혀 나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예전 교회 등에서는 그것을 위해 사탕을 나눠주었습니다. 사탕발림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요. 종교 특히 교회에서는 구호물자를 나눠주었습니다. 먹을 것과 몸에 입을 것을 나눠 주는 교회는 천사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교도들을 위해 협동조합 정신을 발휘합니다.
 
신념공동체가 이익공동체의 장점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종교나 정치는 자신들의 신념을 지지하는 이들을 확보하기 위해 갖가지 이익으로 밖의 상대를 이끌어드리려고 노력합니다. 신념이 희박해지는 현실에서 이익공동체는 굉장한 유인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에 사섭법이라는, 오늘날로 말하면 포교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보시, 애어, 이행, 동사로 중생을 진리의 세계로 끌어드리는 것입니다. 보시(布施)는 상대에게 무언가를 나눠주는 것이고, 애어(愛語)는 부드러운 언어로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고, 이행(利行)은 이익을 나눠주는 행위이고, 동사(同事)는 함께하는 것입니다. 타자를 교화하여 자신들의 신념 세계로 끌어드릴 때 사섭법은 어느 종교나 집단에 유의미한 방법일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하면서 우리가 하는 불교가 이 땅에 널리 퍼져 중생들이 깨달음에 이르러 함께 잘살기를 추구한다면 사섭법의 정신을 잊지 않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불교하는 분들도 서로를 나누고 이익을 독점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불교 종단들의 문제는 거의가 이익의 독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해방공간 이후 정치계에 유행했던 속담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좌파는 분열로 망하고 우파는 부패로 망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일반의 불교나 개신교의 모습을 보면 수긍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교파나 종파가 나눠지는 것은 방법론의 문제였다면 현재는 거의가 재산 분쟁의 여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열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가능하면 같은 집단에 있을 때 차이는 인정하더라도 수용하는 아량이 있습니다. 같은 이념 속에 지나친 분화가 건강할 수 있지만 자칫하면 생명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관용하는 정신이 절대적입니다. 다음은 이익의 분배에서 사사로움을 떠나야 합니다. 불가 의례 전승집단에는 “평등공양 차등보시”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공양은 똑같이 받으나 그 능력과 역할에 따라 이익을 나눠준다는 것입니다.
 
평등과 차등의 미학을 잃어버려서는 곤란합니다. 문제는 차등이 지나치다는 것입니다. 대학의 경우 같은 강의를 해도 학생지도와 행정업무를 부담하는 전임과 그렇지 않은 비전임의 보수 차이는 무려 그 열 배가 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하긴 이 모습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어느 교회목사 차량 운전기사와 노 목사의 급료 문제를 다룬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곳도 크게 예외가 아니라고 합니다. 공양을 평등하게 한다는 정신이 한국 사찰 어디를 가도 실천하는 곳을 보기 힘듭니다. 차등은 더욱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회주의 체제가 사라지게 된 원인의 하나도 지나친 평등 추구라고 할 수 있지만 지나친 차등은 분열로 이어지고, 같이 망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불교를 세상에 영속하게 하는 방법은 최소한 같은 집안끼리 경쟁하더라도 인정하고 평등과 차등의 정신에 따라 이익을 고르게 나눠주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2019.06.0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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