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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春大吉 建陽多慶
관리자
2024.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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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春大吉 建陽多慶
동지 이후 세 절기 사이 45일 간은 추위가 심해서 세 악기라고 한답니다. 그런 시기가 지나고 봄기운으로 돌아서는 입춘이니 크게 길상을 바라고 햇볕이 다시 기운을 들고 일어나기 시작하니 경사가 많기를 기원합니다.
돌고 도는 윤회 속에서 인간은 늘 같은 희망을 반복합니다. 사실은 참 바보 같은 소박한 바람일지도 모릅니다. 일일시호일이고 연년시호년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좋고 나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좀 더 나은 삶을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윤회하는데 어찌 좋을 수만 있겠습니까. 우리는 태어났으니 빠르게 죽음으로 달려갑니다. 흔히 청소년 때가 제일 시간이 안 가지요.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바라지 않습니까.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할 줄 알고요.
냉혹한 정글을 혼자 개척해야 한다는 엄중함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환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으니까요. 어제는 어느 불교 단체의 초청으로 그들의 어울림법석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좋은 생각을 가진 불자 시민운동 단체 같은 성격이라고 보였는데, 그들이 그리는 세상은 분명해 보이지만 단체를 이끄는 분들의 초탈적인 운영을 보고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낭만적 운동은 취미생활에 머물지 않을까 하는 것을요.
생사를 걸고 수행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나의 생사를 뛰어넘을 수 있고, 다른 이들의 생사를 뛰어넘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낭만적인 대처와 접근만으로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식인들의 취미로 불교를 하는 것만 해도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지만요.
일즉다 다즉일의 화엄사상적 사고는 굉장히 유연한 사고, 연기적 사고를 하게 하여 우리를 해탈 열반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런데 그것을 빙자하거나 왜곡하여 소박하거나 무기력하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소승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남방불교를 소승이라고 칭하는 대승의 논법을 거부해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스스로 자신을 칭하는 명칭이 소승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생각을 조금은 수정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소승이나 대승은 지역이나 경전의 소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고와 행동에 있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를 해도 소승이 있고, 테라와다 불교를 해도 대승이 있을 수 있으나 테라와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대승이 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소승이라고 폄훼해서는 안 되나 대승이 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합니다. 최상의 문명사회를 이룬 현대 문명을 모두 받아쓰면서 그들의 신도들이 그와 같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지 않거나, 못하고 자신의 수행(?)에만 안주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비록 그들이 수행자이므로 유위의 세계, 세속의 세계의 살림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데에만 경도되어 있다면 그런 불교는 소승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면서 중생들의 아픔을 닦아주는 일차적인 모습이 마음의 안락(?)에만 집중해서야 될까요.
최초의 정치는 종교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제정일치에서 제정분리가 되면서 종교인들은 정치에서 배제되었습니다. 그 이후 종교는 사회복지적인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그것마저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집행하거나 지원으로 이뤄집니다.
현대 종교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거기 복속시켜 대속품을 받아 챙기는 역할만 해도 괜찮을까요. 왜 하나님을 특정인[신부 목사 등 종교인]으로 통해야 통할까요. 하나님이 있고 없고 하는 문제와는 다릅니다.
그 하나님을 통하는 방법은 하나님과 통하기 위해 영적인 노력을 가한 이들이 알아차리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을 것입니다. 마치 변호사가 법을 잘 알아서 변호를 해주듯이. 이렇게 너무나도 분명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수없는 종교인들에게 끌려 다니게 됩니다.
제정분리 때부터 종교인의 역할은 하나님[영적인 세계]의 뜻을 대신 전달하는 매신저로 전락하였지만 이제 그 세계는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거기에 목매는 이들이 많은 것은 사회장치 때문일 것입니다.
사회장치 곧 관습은 세월 속에서 대중이 같이 속아오고 놀아나면서 일어난 습관에 불과합니다. 어찌 입춘에 경사가 많고 동지는 경사가 없겠습니까. 태양의 운행에 길흉화복을 담는 종교인들의 이데올로기일 뿐입니다.
하나 입춘이나 동지에 세상의 기운을 얻기 위해서 그런 날에 기도를 하는 것은 영적 세계의 비밀을 밝혀내고 알아내고 따라서 순응하면 안락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입춘 등의 특정의 절기에 하늘 등에 기도를 하는 문화는 인류의 보편적 현상입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은 우주기운(영적 기운의 세계)과 합해지려는 고도의 인간 정신으로 알아낸 것임은 분명합니다. 조용히 우주의 기운을 맞이하려면 헛된 망상의 마음이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정한 입춘을 맞이하기 위해 평안[빠라미따]으로 떠나가 봅시다.
빠라미따
2024.2.4.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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