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공지
바웃다(출가 사문)의 위의
관리자 2024.02.10 34
바웃다(출가 사문)의 위의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에 대해 혹자는 꼰대 같은 소리라고 할지 모른다. 출가 사문이 흰 이를 드러내놓고 웃는 얼굴을 프로필 사진을 사용하거나 출가 사문이 되어 유행가를 부르며 불자가수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 
 
노래하는 데 가지도 말고 듣지도 말라 한 붓다의 말씀은 옛 이야기로 치부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흰 이를 드러내놓고 웃는 모습의 사진을 프로필로 쓰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모르겠다.
 
불교 사문의 최고 몸짓이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나와 남을 건지는 자비행이고 그 진지한 모습이지 않을까. 흰 이를 드러내놓고 웃고 있는 모습은 나에게는 달관의 모습이라기보다 서푼도 안 되는 경함으로 다가온다. 내가 꼰대라서 그럴지 모른다.
 
진지하나 어디 한 쪽에 빠지지 않으며 자비심이 충만하나 마음이 머물지 않는 모습, 이것이 출가 사문의 위의나 표정이 아닐까 한다. 분명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겠지만. 제발 자신이 자신의 프로필을 “모모스님”이라는 식으로 자칭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스님은 내가 아닌 상대가 출가 사문을 존경하며 부를 때 하는 존칭이다.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직위나 직급이나 위치에 존칭 접미사 “님”자를 부치는 집단은 불교 사문들밖에 없다. 참으로 불교답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분들은 말끝마다 “스님이” “스님이”라거나, 스스로 자신을 “스님이” 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우리 불교가 자신을 낮추며 소납, 소승하던 우리 불교 출가 스님들이 이렇게 되었을까.
 
스스로 “스님”이라고 해야 자신의 위치가 높아지는가. 장관이 자신을 장관님이라고 하거나 목사가 자신을 목사님이라고 하고 교수가 자신을 교수님이라고 하는 것을 단 한 번이라도 보았는가. 그렇지 않지 않는가. 
 
(어떤 분들은 스님이라고 해야 자신이 스님인 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논리를 표는 분들이 있는데 상대에게 이름도 밝히지 않으면서 “스님”이라는 사실은 밝히고 싶은지 알 수 없다.)
 
출가 사문은 자신을 낮추며 중생들을 거둬들이는 분들이다. 나를 스스로 높이면 중생들은 순수하게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예를 표한다.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며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밖에 다른 포교방법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붓다 성도 당시 다섯 비구의 한 분인 아삿지의 말없이 탁발하는 위의로 붓다의 양대 제자 수보리와 목건련이 귀의하게 되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 사례를 영원한 모델로 여겨야 한다. 불교 교리를 많이 알아서 일러주거나 장황한 설법이 예나 지금이나 포교의 제일의는 아니다.
 
답은 덕화이다. 덕으로 상대를 교화하는 것이다. 상대는 교화를 당했다는 생각도 없이 자연스럽게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그렇게 교화되어야 하는 세상이다. 어린 아이들도 다 자기 생각이 많은 세상이다. 어른이라고 스님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타자를 교화할 수 없다.
 
하심하고 받아들이고 그렇게 해야 그래도 조금이라도 세상 사람들은 마음을 연다. 어떤 분들은 교화한다며 대중가요를 불러대고 코메디 같은 짓을 반복하는데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수행을 잘해 진리의 법신을 이뤄야 오분법신의 향기로 대중은 말없이 감화되는 것이다.
 
간혹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 보면 참으로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옆에 다른 이들이 있다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카페 벽에는 조용히 차를 마시라는 구절이 영어로 쓰여 있는데, 읽지 못해서인지 시끄럽게 이야기를 한다. 승속을 막론하고 일어나는 일이다.
 
바른 위의가 ‘자기’라는 상품을 가장 잘 드러낸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듯이 조리 있게 진리를 설하라고 했지 큰 소리로 떠들라고 하지는 않았다. 내가 조리가 없으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조리 있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출가 사문의 수행 방법은 문사수(聞思修)라고 했다. 진리의 말씀을 많이 읽고 듣고 깊이 사유하고 그것을 닦아서 그 결과로 일어나는 진리의 향기, 법신의 향기가 세상의 깨닫지 못한 존재(非人)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나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나의 몸은 지금 어떤 모습인가. 굽혀진 허리를 바로 편다. 호흡을 가다듬고 호흡을 본다. 그리고 호흡을 센다. 들어오고 나가고, 반복되는 숨을 본다.
 
빠라미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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