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학토론
시련
관리자 2023.12.28 88
시련

연에 모시는 것을 시련이라고 한다. 시련에 모시는 존재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불당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바깥의 재장에 모실 때는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고, 신중을 모실 때는 신중의 위패를 연에 실어 모신다. 부처님이나 신중을 모실 때는 그분들이 계신 곳에서 그분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별도의 장소로 옮겨야 할 때 연에다 위판 등을 모시고 옮긴다.

그런데 현재 한국불교에서 시련은 사찰 문밖에 도착한 재를 올리기 위해 도착한 혼령을 연에 모시고 절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에 시련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시련의 절차가 시련할 현성을 청해 공양을 올리고 연의 옹호를 부탁하게 되는데, 실제 시련의 절차를 시련절차라는 의문만 행하고 당일 재회를 올린 혼령들은 연에 모시지 않고 들고 들어오고 연은 텅 빈 연만 들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시련절차라는 의문에서 청하는 옹호성중을 모신다고 이해한다.

그렇지 않다. 재회 때 사찰 일주문에서 행하는 시련의 행위는 시련을 할 현성의 신중들을 청해 연을 잘 옹호하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혼령을 맞이하는 대령의 영혼식(迎魂式)을 해야 한다. 이 영혼식의 대상, 곧 재회를 올리기 위해 절에 도착한 혼령의 위패나 위판을 연에 실어 모시고 들어오는 것이 시련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옹호성중을 청하는 시련 절차만 밖에서 하게 되니 옹호성중을 모신다고 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시련을 할 대상인 신중은 청하는 것은 시련을 부탁하기 위해서이다. 시련의 주인공은 당연히 당일 재회의 혼령이나 시주이다.

그래서 사문 밖에서 대령소참을 하고 사문(沙門, 寺門이라고 하지 않음)에 들어오기 전에 사문소참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시고 들어와서 삼보에 인사드리고 영좌에 위패나 위판을 앉힌다. 영혼소 옆에 관욕소를 설치해 관욕을 하고 절 안으로 모시고 들어온다. 사문 밖에서 시련절차를 할 때 대령의 영혼식을 하지 않고 누각 밑에서 대령소참을 하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현재 많은 재장에서 시련 – 대령 – 관욕 – 상단권공 이런 식으로 의례를 진행하면서 시련을 해와서 대령을 하는 의식을 행하다 보니 처음 혼령을 맞이할 때는 혼령에게는 단 한 마디도 안하고 연에 위패를 모셔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행위를 인로왕보살을 모신다고 하거나 현성중의 신중을 모신다고 하거나 부처님을 모신다고 하는 것은 기가 막힐 망발이다.

인로왕보살이나 현성중이나 붓다는 모두 내부자이다. 주인이다. 주인이 주인을 모시는 것을 보았는가. 잘못된 의례를 수없이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위패를 연에 모시라고 하면 위패를 연보다 크게 만들어 연에 싣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텅 빈 연을 들고 다니고 있다. 위패를 너무 많이 만들어서 연에 다 실을 수도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대령의 대상은 당해 혼령이다. 일체 혼령이 아니다. 대령과 영산작법의 대상은 칠칠재를 맞은 당해혼령이다. 수륙재 등 불특정 다수의 혼령을 모시는 것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시련은 하는 이는 현성의 신중이며 이들은 위의로 표현되며 연의 전후좌우에서 연을 옹호해야 한다. 그리고 연에 모실 대상은 재회를 올리기 위해 당도한 당일의 특정 혼령이다. 위패를 너무 크게 만들지 말아야 연에 실을 수 있다. 연에 잘 모시고 들어와서 부처님께 인사드리고 부처님을 향한 놓인 영좌에 앉아서 법문을 듣고 시식을 받고 떠나가게 되는 것이다. 시련을 시련할 대상을 청해 공양 올리는 의례만 하고 실제 대령을 하면서 대령을 하지 않는 현재의 의례는 비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이 평범한 지극히 당연한 것을 수용하지 않고 대령의 시련을 하면서 붓다를 모신다든지, 인로왕보살을 모신다든지, 신중을 모신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모시고 가는 이들을 모신다고 하는 기가 막힌 언설을 아무런 생각없이 해대며 주장하는 이들은 무지를 넘어 불교를 폄훼하는 이들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빠라미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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