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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제 사상의 정의
관리자 2023.12.30 64
불교 제 사상의 정의
 
화엄사상 華嚴思想 
요약 불교에서 ≪화엄경≫을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하여 정립된 사상. 
개설 
 화엄사상의 철학적 구조는 법계연기(法界緣起)이다. 즉,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일이 없이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사상으로, 화엄에서 가르치는 무진연기(無盡緣起)의 법칙이다. 사법계(四法界)ㆍ십현연기(十玄緣起)ㆍ육상원융(六相圓融)ㆍ상입상즉(相入相卽) 등은 이 무진연기를 설명하는 화엄사상의 골자이다.
 사법계란 현상과 본체와의 상관관계를 사법계(事法界)ㆍ이법계(理法界)ㆍ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ㆍ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등 넷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사물이 제각기 한계를 지니면서 대립하고 있는 차별적인 현상의 세계를 사법계라 하고, 언제나 평등한 본체의 세계를 이법계라 한다.
 그러나 현상과 본체는 결코 떨어져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어서, 항상 평등 속에서 차별을 보이고 차별 속에서 평등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를 이사무애법계라 한다. 다시 나아가 현상, 그것도 각 현상마다 서로서로가 원인이 되어 밀접한 융합을 유지한다는 것이 사사무애법계이다.
 이 사사무애법계는 화엄사상의 특징을 나타낸 것으로, 일반적으로 중중무진(重重無盡: 끊임없이 이어짐)의 법계연기라고 하며, 그 특징적인 모습을 열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 10문은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ㆍ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ㆍ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ㆍ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 등으로서 십현연기문이라고도 한다.
 동시구족상응문이라 함은 현세에 과거와 미래가 다 함께 담겨 있음을 뜻하고, 제법상즉자재문은 현상계의 모든 사물이 서로 차별하는 일이 없이 일체화되고 있다는 말이다. 또, 하나[一]는 하나의 위치를 지키고 다(多)는 다의 면목을 유지하는 가운데, 하나와 다가 서로 포섭하고 융합한다는 것이 일다상용부동문이다. 이때 하나가 없으면 다가 없으며, 하나가 있으면 일체가 성립한다. 모든 것이 홀로 고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도 되고 십으로도 되고 일체로도 된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하여 화엄에서 가르치는 일즉일체(一卽一切)ㆍ일체즉일(一切卽一)ㆍ일즉십(一卽十)ㆍ십즉일(十卽一)의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또한, 모든 현상의 각각에는 총상(總相)ㆍ별상(別相)ㆍ동상(同相)ㆍ이상(異相)ㆍ성상(成相)ㆍ괴상(壞相) 등 여섯 가지 모습이 함께 갖추어져 있고, 전체와 부분 또는 부분과 부분이 서로 일체화되고 있다는 것을 전개시킨 것이 육상원융의 이론이다.
 ≪화엄경≫에서 설하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는 현상계와 본체, 또는 현상과 현상이 서로 대립하는 모습을 그대로 지니면서도 서로 융합하여 끝없이 전개되는 약동적인 큰 생명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 연화장세계에서는 항상 ≪화엄경≫의 중심불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대광명을 비추어 모든 조화를 꾀하고 있다. ≪화엄경≫은 우주의 질서를 미적으로 표현한 경전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통일국가의 상징이기도 하다.
 화엄의 가르침은 서로 대립하고 항쟁을 거듭하는 국가와 사회를 정화하고, 사람들의 대립도 지양시킴으로써 마음을 통일하게 하는 교설이다. 따라서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같은 전제왕권국가의 율령정치체제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하는 큰 구실을 담당하였다.
 ≪화엄경≫은 인도 용수(龍樹)의 편집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 <용수전>에 의하면, 대룡보살(大龍菩薩)의 인도로 용궁에 들어갔던 용수가 방등경전과 무상묘법(無上妙法)의 글을 얻어왔다는 기록만이 있을 뿐 ≪화엄경≫을 가져왔다는 말은 없다. 다만, 법장(法藏)의 화엄전기에서만 용수가 용궁에서 가져왔다고 기록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화엄경≫을 사상적인 측면에서 보면 무착(無着)과 세친(世親) 등의 연기사상(緣起思想)에 힘입어 교학의 체계가 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친이 <십지품 十地品>의 별행(別行)과 ≪십주경 十住經≫에 의거해서 ≪십지경론 十地經論≫ 12권을 제작하여 ≪대지도론 大智度論≫ㆍ≪섭대승론 攝大乘論≫과 함께 화엄사상의 기초교리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상승(相承)하는 조사(祖師)를 정할 때는 인도의 마명(馬鳴)과 용수, 그리고 중국에서는 두순(杜順)을 초조(初祖)로 삼아 지엄(智儼)→법장→징관(澄觀)→종밀(宗密)까지를 합해서 화엄칠조(華嚴七祖)로 세우고 있다. 마명을 화엄조사로 받들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대승경전을 약축하여 사상을 정립한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을 저술하였으며, 중국의 화엄종주들이 한결같이 ≪대승기신론≫을 즐겨 연구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최초로 ≪화엄경≫을 번역한 승려는 동진의 각현(覺賢)이다. 그 뒤 한역본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종단이 두순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두순은 ≪오교지관 五敎止觀≫과 ≪법계관문 法界觀門≫을 저술하여 종지를 확립하였다. 두순의 제자 지엄은 ≪화엄경≫ 본문을 해석하는 ≪법계관문≫과 ≪화엄경≫의 요지만을 모은 ≪공목장 孔目章≫, 그 밖에도 ≪오십요문답 五十要問答≫과 ≪일승십현문 一乘十玄門≫을 저술하였다.
 지엄의 제자로는 중국의 법장과 신라의 의상(義湘)이 있다. 의상은 지엄의 인가를 받은 뒤 신라로 돌아와 원효(元曉)와 함께 화엄사상을 전파하였다. 법장은 중국에 화엄학을 꽃피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화엄경탐현기 華嚴經探玄記≫와 ≪화엄오교장 華嚴五敎章≫은 중국화엄종의 기초를 확립한 대표적인 저술이다. 법장의 문하에는 혜원(慧苑)이 있고 혜원의 문하에서는 징관이 나왔으나, 징관은 ≪수소연의초 隨疏演義鈔≫를 지어 혜원의 ≪음의 音義≫가 비정통이라고 논파하였다.
 징관의 법맥을 이은 종밀은 ≪원인론 原因論≫을 지어 유·불·도 삼교의 사상을 대비시킴으로써 불교의 참뜻을 선양하였고, 교(敎)와 선(禪)의 병행을 논하는 ≪선원제전집도서 禪源諸詮集都序≫를 저술하여 고려의 지눌(知訥)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종밀의 사상은 송대에 와서 정원(淨源)으로 이어졌는데, 정원은 고려의 의천(義天)과 사상적인 교류가 많았던 화엄종사이다.
 
반야사상 般若思想 
요약: 불교의 근본사상 가운데 하나. 연기설(緣起說)을 공(空)의 입장에서 해명하여 지혜롭게 사는 법을 철학적으로 제시한 대표적인 사상. 
인도 
 반야사상은 공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확립시키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반야사상을 천명한 중관학파(中觀學派)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일체개공설(一切皆空說)은 이미 대승불교 초기에 성립되어 있었다. 공(空)이란 존재물 그 자체에 실체인 아(我)가 없음을 뜻한다.
 이것은 이미 석가모니 당시의 원시불교에서, “모든 현상은 인(因)과 연(緣)이 가적(假的)으로 화합하여 생겨났기 때문에(因緣所生), 거기에는 아(我)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諸法無我).”고 주장한 불교의 근본 입장을 밝힌 것이다. 특히, 대승불교가 흥기(興起)함에 따라 ≪반야경 般若經≫ 계통의 경전이 성립되면서 공의 사상은 더욱 강조되었다.
 원래 이것은 부파불교시대(部派佛敎時代)에 상좌부(上座部)계통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중심으로 주장된 법유(法有)의 입장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일체 존재를 상의상대(相依相待)라는 입장에서 파악하여 일체의 아집(我執)을 배격한 자유무애(自由無碍)의 세계를 전개하려고 한 것이다.
 공을 이론적인 면에서 볼 때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고 보는 인공(人空)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므로 실체로서 자아는 없다는 법공(法空)으로 나누어지며, 이를 합쳐서 인법이공(人法二空)이라는 초기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이 싹트게 되었다.
 이 공의 사상은 용수(龍樹)와 제바(提婆)와 라후라발타라(羅睺羅跋陀羅)에 의해서 확립되었다. 남인도의 브라만 출신인 용수는 처음 소승불교를 배웠으나, 뒤에 히말라야산으로 들어가서 노비구(老比丘)에게서 대승불교를 배웠다고 한다. 그 뒤 초기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많은 주석서를 저술하여 독자적인 사상을 세웠다.
 그는 ≪반야경≫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여 공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규명하고, 대승불교 교리의 중요한 기초를 닦았다. 용수는 반야사상뿐만 아니라 모든 대승불교사상의 기초를 확립하였기 때문에, 그는 후세에 중국이나 우리 나라 등의 대승불교권에서 8종(宗)의 조사(祖師)로 존숭을 받았다.
 용수의 저작은 한역(漢譯)으로 20부 150권, 티베트역으로 95부가 있다. 이 중 반야사상을 천명한 대표적인 저술로는 연기와 공 등의 불교 근본사상을 서술한 ≪중론송 中論頌≫과 ≪십이문론 十二門論≫이 있다.
 그리고 ≪반야경≫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부류에 속하는 ≪대품반야 大品般若≫를 초록하여 당시의 여러 사상이나 전설, 교단의 규정 등을 공의 입장에서 비판, 해설하고, 보살의 실천수행 방법인 육바라밀(六波羅蜜)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한 ≪대지도론 大智度論≫이 있다.
 용수의 제자인 제바는 용수가 주창한 공의 이법(理法)을 체득하고 용수의 입장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넘어서서 외교(外敎:다른 종교)를 격렬하게 논란하였다. 용수는 그의 저술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관찰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제바는 그의 저술 ≪백론 百論≫에서 여러 견해를 ‘파석(破析)한다’, ‘차견(遮遣)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즉, 용수는 유무이견(有無二見)의 파석을 통해서 올바른 자세를 나타내려고 한 데 반하여, 제바는 이 입장을 계승하면서도 날카로운 논법으로 여러 학파의 이견을 논파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에게는 ≪백론≫ 외에도 ≪사백론 四百論≫·≪백자론 百字論≫ 등 모두가 백이라는 글자를 쓰고 있는데, 그것은 백의 원어인 사타(sata)가 깨뜨린다는 동사의 어간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그의 입장을 엿볼 수가 있다.
 제바의 제자 라후라발타라는 ≪중론송≫의 팔불(八不)을 주석하였다. 이상의 3인을 중심으로 한 계통을 중관파(中觀派)라고 하는데, 이 시대까지는 다른 학파와 대립하는 학파가 아니었다.
 중관파라는 명칭은 용수의 ≪중론송≫에서 ‘불생불멸 불상부단 불일불이 불거불래(不生不滅不常不斷不一不異不去不來)’의 팔불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여러 개념의 어느 한편에도 집착하지 않는 입장을 취한다고 하여 중도(中道)라고 한 데서 유래된 것이다.
 후일 중관파는 불호(佛護)의 계통을 이어받은 프라산기카파(Pra-sangika派, 必遇性空派)와, 이를 비판하는 청변(淸辨)의 계통인 스와탄트리카파(Sua-tantrika派, 自在論證派)의 두 파로 나누어졌다.
 이것은 공의 입장을 파악하는 방법의 상위(相違)에서 나누어진 것으로, 불호는 공이란 입장이 없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다른 이론을 파석해야만 표출될 수 있다고 주장한 데 대하여, 청변은 공이란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입장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불호의 계통에서는 그 뒤 월칭(月稱)과 적천(寂天) 등이 나오고, 청변의 계통에서는 관서(觀誓)가 나와 각기 용수의 ≪중론송≫에 독자적인 주석을 가하였고, 이후의 대승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식사상 唯識思想 
요약: 마음 외에는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으며, 마음에 의하여 모든 것이 창조된다는 사상. 
 선과 악도 마음이 발생하는 것이며 악을 명하고 선을 실행하는 것도 마음이 하면 범부의 무지를 정화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마음이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유식사상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 육식에 의하여 업력이 조성된다고 하는 원시불교와 소승불교에도 있다.
 그런데 소승불교는 심ㆍ의ㆍ식(心意識)으로 육식(六識)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심은 모든 업력을 보존하였다가 다른 과보를 받게 하는 마음이며, 의는 모든 것을 생각하는 마음이며, 식은 모든 것을 인식하는 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들 심, 의, 식은 그 체성(體性근본 성품)이 일체(一體)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승불교에서는 심의식을 팔식(八識)으로 나누고 팔식의 심체(心體:마음을 이루는 근본 성질)는 각각 다르다고 하였다.
 신라의 고승인 원측법사의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에 의하면 대승불교를 주창한 용수보살은 육식 외에 말나식(末那識:제7식)과 아뢰야식(阿賴耶識:제8식)의 사상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유식사상을 체계화한 무착(無着)은 아뢰야식(阿賴耶識) 등을 팔식으로 확정하여 인간의 심체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유식사상의 역사와 사상은 다음과 같다.
 대승불교를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는 무착논사(無着論師)가 4세기경에 정신세계를 좀 더 진리스럽게 설명하고자 유식사상을 성립시켰다. 무착은 ≪해심밀경 解深密經≫과 ≪십지경 十地經≫ 등 대승경전의 유심사상(唯心思想마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며 유일의 존재라는 사상)을 종합하여, 모든 것은 마음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고 마음에 의하여 현상계가 창조되고 실현된다는 유식사상을 창립한 것이다. 역사적인 인물인 무착보살이 유식사상을 전수하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무착이 신봉한 미륵보살(彌勒菩薩)은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분별유가론(分別瑜伽論),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 변중변론(辨中邊論), 금강반야바라밀경론(金剛般若波羅密經論) 등을 설하였다. 무착은 이들 논전을 편집하여 간행하였으며 후세에 유식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뜻에서 오대부론(五大部論)이라고 하였다.
 무착보살은 ≪해심밀경≫과 ≪십지경≫과 ≪아비달마경 阿毘達磨經≫의 경전과 미륵이 설한 오대부론 등의 유식사상을 다시 체계화하였다. 그가 저술한 서적들은 ≪섭대승론 攝大乘論≫과 ≪현양성교론 顯揚聖敎論≫과 ≪아비달마집론 阿毘達磨集論≫ 등 많은 저술이 있으며 이들 저술은 유식학 연구에 중요하다.
 이와 같이 여러 대승경전과 미륵과 무착의 논전에 나타난 유식사상을 초기유식학(初期唯識學)이라고 한다. 초기유식학을 다시 크게 발전시킨 학자는 무착의 친동생인 세친논사(世親論師)이다. 세친은 처음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는 소승불교의 종파에 귀의하여 ≪아비달마구사론 阿毘達磨俱舍論≫이라는 유명한 소승논전을 저술하여 소승불교를 포교하다가 친형인 무착보살의 권유에 의하여 대승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세친은 곧 미륵보살과 무착보살의 저술을 연구하고 유식학을 체계화하는 데 공이 컸다. 그의 유식학을 조직유식학(組織唯識學)이라고 칭한다. 조직유식학은 팔식의 심체와 심체의 작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이들 정신계와 물질계의 인연관계도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세친이 저술한 ≪유식삼십론 唯識三十論≫과 ≪대승백법명문롬 大乘百法明門論≫에 잘 나타나고 있다.
 ≪유식삼십론≫은 모든 유식학을 삼십송(三十頌)에 집약하여 체계화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또 ≪대승백법명문론≫은 모든 유식사상을 백 가지 단어에 포함시켜 체계화한 논전을 말한다. 이와 같은 ≪유식삼십론≫과 ≪대승백법명문론≫은 모든 유식학을 잘 정돈하여 축소하였기 때문에 몇 사람의 학자만이 그 뜻을 알 수 있었고 그 밖에 일반인은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안혜논사(安慧論師)와 호법논사(護法論師) 등 28명의 학자들이 해설서를 간행하였으며, 그 가운데 열 사람의 해설서가 가장 훌륭하였다.
 그 열사람은 난타(難陀), 친승(親勝), 화변(火辨), 덕혜(德惠), 안혜(安慧), 호법(護法), 정월(淨月), 최승자(最勝子), 승우(勝友), 지월(智月) 등을 말하며 이들은 각각 열 권씩 저술하였다. 이들은 유식학의 대학자라는 뜻에서 후세에 십대논사(十大論師)라고 부르게 되었다. 십대논사들이 유식학을 크게 발전시켰다고 해서 이 시대를 유식발전기(唯識發展期)라고 한다.
 인도의 유식학은 한국과 중국으로 전래되어 더욱 발전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중국에는 보리유지(菩提流支)가 전한 지론종(地論宗)과 진제삼장(眞諦三臟)이 전한 섭론종(攝論宗)의 유식학이 있다. 그리고 중국의 현장법사(玄奘法師, 602∼664)가 인도에 유학하여 나란타사(那爛陀寺)에서 계현논사(戒賢論師)의 지도를 받으며 유식학을 전공하였다. 이곳에서 유식학에 관한 서적들을 수집하여 귀국한 후 이들은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이 가운데 십대논사가 저술한 논전들을 열 권으로 축소하여 번역하고 이름을 ≪성유식론 成唯識論≫이라고 하였다. 이 ≪성유식론≫과 함께 ≪해심밀경≫과 ≪유가사지론≫과 ≪섭대승론≫ 등이 한역되면서 중국불교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법상종(法相宗)이라는 종파가 성립하게 되었다. 법상종의 종조는 사실상 현장법사이지만 유식학이 제일의 사상이라는 교판사상을 논리화하여 종파를 조직한 규기법사(窺基法師:632∼683)가 제1대조가 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에는 유식학을 이념으로 한 지론종과 섭론종, 그리고 법상종이 생겼다. 이에 대하여 한국의 유식학은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섭론종을 수학하였고, 다음으로 신라의 원측법사(圓測法師, 613∼696)가 종합적으로 연구하였다. 원측법사는 15세에 중국에 유학하여 처음에는 섭론종의 유식학을 전공하였고 그 밖에 대승과 소승의 교학을 연구하고 어학도 뛰어나 6개 국어를 잘 하였다고 한다.
 원측법사는 이어서 현장법사가 도입한 법상종의 유식학을 연구하여 성유식론과 유가사지론 등에 대한 연구서도 규기법사보다도 먼저 발표하였다. 이와 같이 원측법사는 규기법사를 비롯한 중국계의 학자들과는 달리 모든 유식학을 종합하여 일승(一乘)적인 사상을 건립하였다.
 이러한 학문의 특성 때문에 중국에 유학한 학승은 물론 중국승려들까지도 원측법사로 부터 사사를 받았다. 원측은 서명사에 오래 주석하였기 때문에 원측의 호를 서명(西明)이라 하였으며, 서명을 추종한 학자들은 서명학파 또는 신라의 유식종이라고 칭하였다. 원측법사의 직계제자로는 도증(道證)이 있으며 도증은 원측의 학문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성유식론요집 成唯識論要集≫을 저술하여 중국계 학자들의 비판을 타파하였다.
 신라의 신방(神防)법사는 현장법사의 번역사업에 참여하였고 승장(勝莊)법사와 자선(慈善)법사도 매우 훌륭한 유식학자였다. 국내에서 유식학을 전공한 학자로는 제일 먼저 원효(元曉)대사를 들 수 있다. 원효대사는 ≪해심밀경 解深密經≫과 ≪성유식론≫과 ≪유가사지론≫ 등 많은 유식학의 경전과 논전을 연구하여 주소(註疏)를 썼다. 현재 남아있는 저술 가운데 가장 먼저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 ≪이장의 二障義≫를 비롯하여 ≪유가사지론소≫와 ≪성유식론소≫ 등이 있다.
 원효는 ≪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 등 현존의 저술에 유식학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다. 원효는 진제(眞諦)가 전한 아마라식(阿摩羅識)설과 현장(玄奘)이 전한 아뢰야식(阿賴耶識)설을 함께 인용한 것으로 봐서 섭론종과 법상종의 유식학을 모두 통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수경(順璟)법사의 인명학(因明學)은 중국에서도 유명할 만큼 뛰어났고, 경흥(璟興)과 둔윤(遁倫)과 태현(太賢) 등의 유식학도 중국과 일본에까지 크게 영향을 끼쳤다.
 현재 남아 있는 원측법사의 ≪해심밀경소 解深密經疏≫와 둔윤법사의 ≪유가론기 瑜伽論記≫ 등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저술이다. 이들 저술에 의하여 신라의 유식학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고 현재도 일본과 중국의 불교학자들은 이들 저술을 연구하여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유식학은 신라의 고승인 지통(智通)과 지달(智達)과 지봉(智鳳) 등 법사들이 일본에 건너가 전달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 유식학은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저술을 통계하여 보더라도 일본은 물론 중국보다도 더 많았다. 이러한 학풍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쇠퇴하였다.
 경전에 “마음이 청정하면 중생도 청정하고 마음이 고뇌하면 중생도 고뇌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마음이 생기면 여러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여러 법이 멸한다.”라고 한 말들은 모두 유식사상과 통한다. 그런데 보다 대승적인 유심사상이면서 유식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화엄경의 유심사상이다.
 화엄경에 의하면 “마음은 미술가와 공예사와 같이 각종의 오온(五蘊)을 만들어 낸다.”라는 말이 있다. 오온은 몸과 마음의 체성과 작용이 집합하여 이루어진 인격체를 뜻한다. 이와 같은 인격체는 마음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마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心爲法本]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식사상은 ≪해심밀경≫과 ≪유가사지론≫ 등의 만법유식(萬法唯識)사상과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성유식론에 의하면 유(唯)는 마음 밖에 다른 경계가 있다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고 식(識)은 오직 심체뿐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경지를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고 한다. 유식무경은 오직 마음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며, 다른 것은 마음에 의지하여 존재하여 마음 밖에 어떤 것도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마음의 소유자로서 모든 것은 오관을 통하여 마음에 나타나고, 마음에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때문에 이러한 정신계를 유식(唯識)이라고 한다.
 옛부터 유식의 뜻을 설명할 때 마음내용을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여 왔다. 이를 사분설(四分說)이라고 하며 그 사분은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 自證分) 등을 말한다. 이러한 사분은 마음이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식 자체가 대상을 변화하여 인식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식은 주관과 객관을 변화시켜서 인식하게 된다.
 이와 같이 마음 위에 나타난 모든 모습을 경상(境相)이라 하며 이를 상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 모습을 상대하여 인식하는 것을 견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 상분과 견분은 자증분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시계를 종합적으로 관찰하여 보면 모든 물질계와 정신계가 마음에 의하여 인식되고, 나아가서 물질계도 마음을 떠나서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로써 유식사상이 성립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유식학에서는 마음의 체성을 유식실성이라고 한다. 유식의 실성은 진실하고 변화가 없는 진여성(眞如性)을 뜻한다. 마음의 실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에 시작도 없고 종말도 없으면서 마음속을 빛나게 하는 지혜를 발생한다.
 이러한 지혜와 깨달음을 유지하는 것을 불성(佛性)이라 하며 불성에서 발생하는 지혜를 사지(四智)라고 한다. 사지는 성소작지(成所作智)와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 등 네 가지 지혜를 말한다.
 ① 성소작지는 모든 중생을 관찰하며 근기에 따라 이익을 주는 지혜이다. 이 지혜는 본심에서 발생하는 원력(願力)에 따라 이타적인 자비의 사업을 성취하는 것이다.
 ② 묘관찰지는 모든 물질계와 정신계의 자체에서 나타내는 자상(自相)과 서로 의존하고 상부상조하며 공동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공상(共相)을 무애자재하게 관찰하는 지혜이다. 이 지혜가 있는 수행인은 공덕과 보배를 대중들에게 베풀며 큰 진리를 가르쳐서 모든 의심을 없애주고 큰 이익과 즐거움을 베풀어주게 된다.
 ③ 평등성지는 일체의 법과 자타의 유정들을 모두 평등하게 이익을 주는 대자대비의 지혜이다.
 ④ 대원경지는 마치 크고 둥근 거울에 모든 사물의 영상이 비치듯이 모든 진리를 환하게 관찰하는 지혜이다. 이 지혜는 모든 번뇌가 정화되어 발생하는 지혜로서 관찰하기 어려운 미세한 진리의 모습을 능히 관찰한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이타적인 지혜[菩提]로서 매우 미세하여 알기 어렵다. 그리고 모습[境相]에 우매하지 않고, 체성과 형상이 모두 청정하며 원만한 덕성을 지니게 되며 이러한 공덕을 중생과 보살들에게 베풀어주는 지혜이다.
 이상과 같이 마음의 실성은 네 가지 지혜를 발생하며 자비를 실현하게 된다. 그리고 실성은 사열반(四涅槃)을 실현한다. 사열반은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과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과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과 자성청정열반(自性淸淨涅槃)을 말한다.
 첫째, 유여의열반은 마음의 번뇌가 거의 정화되었으나 아직도 미세한 번뇌가 남아 있지만 고통이 없는 열반을 실현한다. 둘째, 무여의열반은 번뇌가 완전하게 정화되어 열반이 구현된 것을 말한다. 셋째, 무주처열반은 어떠한 거주처에서든지 항상 안정과 즐거움을 실현하는 열반을 뜻한다. 넷째, 자성청정열반은 본래 자성이 청정하고 진실한 진리를 간단없이 보존하고 있는 열반성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유식의 실성은 사지와 사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며 진여의 본성이기도 한다. 이 경지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실현하는 진리의 세계이다. 즉 아공은 아집이 없는 무아(無我)를 실현하는 것이고, 법공은 모든 현상계가 인연의 집합체로서 그 인연의 법체가 본래 공한 것임을 증득한 경지이다. 이는 편견의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없는 절대평등한 일진법계(一眞法系)를 실현하는 경지를 뜻한다.
 이와 같이 유식실성은 진여와 법계 또는 실제(實際), 불성(佛性), 공(空), 승의(勝義), 법성(法性)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며 이는 하나의 진리를 이 그 이치에 따라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진리는 마음 외에 따로 있을 수 없으며 마음의 실성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을 유식이라고 한다.
 유식학은 인간의 마음을 심성과 심상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다. 심성은 모습이 없어 이름을 칭하기가 어렵지만 방편으로 진여 또는 불성 및 공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이 진여를 바탕으로 하여 마음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을 심상(心相)이라고 한다. 심성은 진제(眞諦)로서 평등하여 차별이 없지만 심상은 속제(俗諦)로서 차별이 있으며 차별의 마음을 나누어 설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심상의 체성을 팔종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며 이것이 팔식(八識)설이다. 이는 심의식(心意識)을 분류한 것으로서 심(心)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하고 의(意)는 말나식(末那識)이라 하며 식(識)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 6종의 심체로 나누어 설명하며 이들 심체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아뢰아식
 아뢰야식은 모든 업력을 함장(含藏)하고 보존한다는 뜻으로 장식(藏識)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뢰야식은 생명을 보존하고 유지시키는 마음이라는 뜻에서 아다나식(阿陀那識)이라는 별명을 갖는다. 그리고 선업과 악업의 힘에 따라 과보를 바꾸어 받아 출생하는 마음이라는 뜻에서 이숙식(異熟識)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다양한 성능을 갖고 있으며 이 식이 작용하는 모습을 자상(自相), 과상(果相), 인상(因相) 등 삼상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들 삼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상에는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의 뜻이 있다. 능장은 눈, 귀, 코, 혀, 몸, 뜻 등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업력을 능동적으로 보존한다는 뜻이고, 소장은 능동적으로 훈습하고 있는 업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보존하는 것을 말하며, 집장은 말나식에 의하여 집착되어진 것을 뜻한다.
 말나식에 의하여 집착되는 동안을 윤회의 기간으로 하며 그 집착이 없어지면 윤회에서 해탈하게 된다. 왜냐하면 집착하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수행에 의하여 정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상은 아뢰야식이 업력에 의하여 태생(胎生)과 난생(卵生)과 화생(化生) 등의 출생으로 과보를 받는 것을 뜻한다. 과보는 개인이 수용하는 사회적인 과보가 있고 여타 생명체와 함께 수용하는 사회적인 과보가 있다. 예를 들면 자연계는 공동으로 수용하는 공동의 과보라고 할 수 있다.
 인상은 아뢰야식 내에 보존된 업인을 뜻한다. 중생각자가 조성한 업력은 아뢰야식에 보존되었다가 인연을 만나면 정신과 육체의 행동을 발생하는 것이며 자신의 몸과 자신이 사는 세계까지도 창조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을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칭한다. 이와 같은 아뢰야식의 삼상(三相)을 현재의 생활에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행동은 아뢰야식 내의 업인[因]에 의하여 발생한 결과이며 동시에 그 행동은 업인이 되어서 아뢰야식 안에 보존된다. 그리고 보존된 업인은 미래에 출행할 때 개인업[不共業]이 있고 여타의 생명체와 함께 수용하는 공동의 업[共業]이 있다. 이러한 업력이 개인과 공동의 과보를 받게 하며 모든 세계를 창조하는 원인이 된다는 뜻에서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라고 칭한다.
 
(2) 말나식(末那識)
 말나는 의(意)의 뜻이 있으며 의는 사량(思量)의 뜻이다. 사(思)는 인위적으로 선과 악을 조작(造作)한다는 뜻이며 량(量)은 인식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상대하여 무아(無我)의 진리를 망각하고 아상(我相)을 조작하여 집착하는 인식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나식을 사량식이라고도 하며 사량식은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 등의 번뇌를 지속적으로 야기하게 된다.
 아치는 무아에 대한 망각을 뜻하고, 아견은 자아의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망견을 뜻하며, 아만은 자신만이 제일이라는 생각을 뜻하고, 아애는 자신을 집착하고 애착하는 번뇌를 말한다. 이들 네 가지 번뇌는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되며 여타의 식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근본번뇌라 하고 말나식을 번뇌의 발생처로서 윤회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3) 의식(意識)
 의식은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생각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마음을 뜻한다. 현재는 눈, 귀, 혀, 몸을 통하여 외부의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등을 인식할 때 선과 악을 결정하며 모든 생각을 결정하여 정신작용을 나타내고 몸의 행동도 결정하는 마음이다. 의식은 생각이 깊고 넓으며 모든 것을 반연하며 생각한다는 뜻에서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의식은 별명이 많으며 그 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분별하고 결정짓는 의식이라는 뜻에서 분별의식(分別意識)이라 한다.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등 오식(五識)과 함께 외부의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등의 물질계를 분별한다는 뜻에서 오구의식(五具意識)이라 한다. 산란하고 고통스러우며 가치를 판단하지 못하고 어지러운 생각을 발생하며 정신과 육체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므로 이를 산란의식(散亂意識)이라 한다.
 잠잘 때 꿈속에서 온갖 환상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과거세에 경험하고 체험했던 것이 아뢰야식에 보존되었다가 의식을 통하여 발생한다고 해서 몽중의식(夢中意識)이라 한다. 잡념과 번뇌망상이: 마음이 항상 안정되고 지혜로우며 모든 것을 진리롭게 판단하는 의식이라는 뜻에서 정중의식(定中意識)이라고 한다. 정직한 의식생활은 정중의식의 생활이며 정중의식에는 마음이 억압과 고통이 없으며 진리로운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지속하게 된다.
 
 (4) 오식(五識)
 오식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등 다섯 가지 마음을 뜻한다. 안식은 외부의 색깔을 대상[色境]으로 하여 인식하는 마음이고, 이식은 소리를 대상[聲境]으로 하여 인식하며, 비식은 냄새를 대상[香境]으로 하여 인식하고, 설식은 맛을 대상[味境]으로 하여 인식하며, 신식은 접촉한 것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오식은 외부의 물질계를 주로 접촉하고 인식하는 마음으로서 물질의 업인을 조성하는 정신을 뜻한다. 이들 오식은 각각 선악과 고락을 인식하지만 분별력은 뚜렷하지 못하고 의식의 도움을 받아 인식하게 된다. 이들 팔식설은 법상종(法相宗)의 학설이고 섭론종(攝論宗)에서는 청정심에 해당하는 아마라식(阿摩羅識)을 더하여 구식설(九識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법상종은 아마라식은 중생들이 본래 지니고 있는 진여심(眞如心)에 해당하는 정분(淨分)에 불과하기 때문에 따로 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 원측법사는 팔식설에 동조하였고 원효대사는 아마라식을 가끔 인용하였다.
 마음은 본래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함께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몸에 의지하여 활동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몸이 없는 마음이 있을 수 없고 마음이 없는 육체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마음의 의지처를 좀더 자세하게 말하면 안식은 안근(眼根)에 의지하여 색깔을 인식한다. 그리고 이식은 이근(耳根)에 의지하고, 비식은 비근(鼻根)에 의지하며, 설식은 설근(舌根)에 의지하고, 신식은 신근(身根)에 의지한다.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은 육체의 구조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육체인 것이다. 근(根)은 의지처의 뜻이며 인간의 모습을 장엄한다는 뜻도 있으나 마음은 몸에 의지하고 몸은 마음에 의지하며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는 과보인 것이다. 만약 아뢰야식이 몸에서 벗어난다면 곧 죽음이라고 한다.
 다음 의식의 의지처를 의근(意根)이라고 하며 이 의근은 말나식(末那識)을 뜻한다. 의근이라는 명칭은 원시불교와 소승불교에서도 사용하여 왔으나 그때는 전념(前念)은 후념(後念)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에 전념을 의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승의 의근설은 의식불명이 되었을 때의 의근의 뜻이 없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에서는 졸도하거나 의식불명의 경우에도 의식이 단절하지 않고 항상 작용을 유지하는 말나식을 의근으로 정하고, 의식의 의지처라는 사상을 확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뢰야식도 그 체성이 단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나식과 서로 의지하며 부단하게 유지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간혹 불명하고 작용이 단절된다고 하더라도 말나식인 의근에 의지하여 있다가 다시 의식이 소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근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다음 팔식이 서로 의지하면서도 공동으로 의지하는 공의(共依)와 단독으로 의지하는 불공의(不共依)의 뜻이 있다. 불공의는 안근은 오직 안근에만 의지하고 내지 신식은 신근에만 의지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안식 내지 신식 등 오식은 의식에게 함께 의지하게 되며 외부의 사물을 인식할 때 의식으로부터 분별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의식을 오식에게 분별의 도움을 주는 의지처라고 해서 분별의(分別依)라고 칭한다.
 말나식은 의식과 오식 등 육식(六識)에게 부정과 청정의 영향을 끼치는 데 많은 역할을 한다고 해서 염정의(染淨依)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말나식이 번뇌를 야기하고 있는 한 육식도 번뇌가 있게 되고 말나식이 청정하면 육식도 청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염정의라고 한다.
 아뢰야식은 앞에서 말한 모든 식의 근본적인 의지처가 되는 것이라고 해서 근본의(根本依)라고 한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을 모든 식의 뿌리가 된다고 해서 근본식(根本識)이라고 하며 다른 칠식[七轉識]은 아뢰야식에 의거하여 가지처럼 발생하여 활동하는 마음이라고 해서 지말식(枝末識)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모든 마음은 서로 의지하고 또 몸과도 의지하면서 물질계를 반연하게 된다. 그 반연처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지만 그 내용을 구분하면 인연(因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소연연(所緣緣), 증상연(增上緣)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들 사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인연은 아뢰야식 내의 업인을 반연하는 것을 말하고, ② 등무간연은 한 마음이 간단없이 앞의 생각과 뒷생각이 인연이 되는 것을 말하며, ③ 소연연은 마음이 번연하여 인식하는 대상을 뜻하며, ④ 증상연은 마음과 관계되는 모든 것은 뜻하며 동시에 마음의 활동을 도와주는 모든 것을 뜻한다. 이상과 같은 사연(四緣)은 마음과 관계되는 인연관계를 뜻하며 마음의 활동은 잘 도와주는 인연관계이며 마음을 중심한 유식의 뜻을 더해주고 있다.
 심체는 위에서 설명한 팔식의 체성을 뜻한다. 이들 팔식설은 법상종(法相宗)에서 말하는 심체설이고 이에 대하여 섭론종(攝論宗)은 아마라식(阿摩羅識)을 더하여 구식설(九識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법상종은 아마라식은 마음의 정분(淨分)인 청정한 진여성에 해당한 것이므로 따로 정할 필요가 없으며 중생들의 마음인 팔식만을 설명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팔식의 체성에서는 51종의 작용이 발생한다고 한다. 심체와 심작용은 불가분이한 세 가지 관계가 있다. 첫째 심작용은 항상 심체에 의거하여 야기하는 것이며, 둘째 심작용은 심체와 더불어 상응(相應)하며, 셋째 심작용은 심체에 소속되는 관계가 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심체를 왕(王)에 비유하여 심왕(心王)이라 칭하고 심작용은 왕에 소속된 신하(臣下)에 비유하여 심왕소유법(心王所有法)이라고 한다.
 심체는 왕처럼 결정권이 있으며 심소는 심체의 결정에 의하여 선과 악을 발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발생하는 심작용의 수는 헤아릴 수 없으나 그 가운데 긴요한 것만을 간추려서 51종으로 정하고 있다. 51종을 내용별로 크게 나누면 변행심소(遍行心所), 별경심소(別境心所), 선심소(善心所), 번뇌심소(煩惱心所),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부정심소(不定心所)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들을 육위심소(六位心所)라고 하며 이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변행심소는 모든 식(識)에 두루 나타나는 마음의 작용이라는 뜻이며 여기에는 다섯 가지 작용이 있다. 다섯 가지는 모든 인식대상을 접촉[觸]하고, 접촉할 때 경각심[作意]을 야기하고, 고와 락의 감수성[受]을 야기하며, 마음속의 모습을 생각[想]하며, 선과 악을 조작하는 생각[思]을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② 별경심소는 마음의 내용이 각각 다른 경계를 나타내는 작용을 뜻하며 여기에도 다섯가지가 있다. 그 다섯 가지는 희망을 갖고자 하는 것[欲], 결정적이고 수승한 이해력을 발생하는 것[勝解], 마음에 확실하게 기록해 두는 생각[念], 마음을 통일하고 안정을 유지하는 선정[定], 모든 것을 지혜롭게 관찰하는 것[智慧] 등을 말한다.
 ③ 선심소는 착한마음에서 작용하는 것을 뜻하며 11종의 작용이 있다.
 11종의 선작용은 진리를 확신하는 것[信], 양심에 어긋난 일을 했을 때 곧 마음속으로 반성하는 것[慚], 사회와 대중들에게 잘못을 했을 때 곧 참회하는 것[愧], 비진리적 탐욕을 내지 않는 것[無貪], 성내지 않는 것[無瞋], 정신과 물질 등 모든 것을 지혜롭게 아는 것[無痴], 선행에 근면하는 것[勤], 마음을 가볍고 편안하게 하는 것[輕安], 진리의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놀지 않는 것[不放逸], 마음을 평등하고 정직하게 하는 것[行捨], 모든 생명체를 보호하고 해롭게 하지 않는 것[不害] 등이다.
 이러한 11종의 선심소는 금생에 행복을 가져다 주고 내생에는 극락세계에 인도하는 업력을 많이 조성하는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이 유식학의 수행사상이다.
 ④ 번뇌심소는 번뇌는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요란하게 하는 번요(煩擾)의 뜻이며 마음을 고뇌케 하는 고뇌의 뜻도 있다. 번뇌는 여러 작용을 나타내므로 별명이 많다.
 첫째로 지혜로운 마음[四智]를 방해하고 덮는다는 뜻에서 부장(覆障)이라고 하며, 둘째 번뇌는 안정된 마음을 파괴하고 구속하며 결박한다고 해서 결박(結縛)이라 하고, 셋째 번뇌는 죄를 짓고 윤회하게 하며 삼계(三界)의 악도에 출생하게 하고 설사 선도에 출생하더라도 곧 그 생명체를 구속하는 작용을 한다고 해서 계속(繫屬)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번뇌는 말나식과 의식이 중심이 되어 발생하게 되며 여기에는 뿌리가 되는 번뇌를 근본번뇌(根本煩惱)라 하고, 근본번뇌에 의하여 발생하는 번뇌를 지말번뇌(枝末煩惱)라고 한다. 근본번뇌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 악견(惡見) 등을 말한다.
 탐은 정신과 물질의 모습이 인연의 집합인 것을 망각하고 자신과 사물에 대해서 탐욕을 갖는 것, 진은 성내는 것을 뜻하고, 치는 정신과 물질에 대한 무지를 뜻하며, 만은 자신만을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의는 진리를 의심하고 자신과 남을 의심하는 것이며, 악견은 인과법과 윤회의 법 그리고 무상의 도리와 인연법을 모르는 망견을 뜻한다.
 ⑤ 수번뇌심소는 위에서 말한 근본번뇌에서 파생된 지말적인 번뇌를 말한다. 이 수번뇌심소는 20종의 번뇌가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분을 참지 못하고 성내는 것[忿], 원한을 품고 한탄하는 것[恨], 자신의 죄를 숨기는 것[覆], 한탄하고 고뇌하는 것[惱], 자신의 명리만을 생각하고 남의 영광을 질투하는 것[疾嫉], 재물과 진리를 아끼는 것[慳], 영리와 명예를 얻기 위하여 속이는 것[誑], 아첨하는 것[諂], 남을 해롭게 하는 것[害], 교만하는 것[憍], 자신의 부덕을 생각하지 않고 어질고 착한 것을 가볍게 여기며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것[無慚]이 있다.
 그리고 세상의 질서를 지키지 않고 세간의 잘못을 범하고 참회하지 않은 것[無愧], 마음이 흔들리는 것[掉拳], 마음이 침체되는 것[惛沈], 진리와 덕성과 인과 등을 믿지 않은 것[不信], 선법을 실천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는 것[懈], 선행을 실천하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放逸], 모든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失念], 마음이 산란한 것[散亂], 모든 것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것[不正知] 등이다.
 이와 같은 20종의 수번뇌는 근면하게 수행하면 곧 정화될 수 있는 번뇌들이며 6종의 근본번뇌는 보살의 수행을 성불할 때까지 부단히 하여야 정화될 수 있는 것이다.
 ⑥ 부정심소는 일정하지 않은 심작용을 말하며 이 부정심소는 네 가지가 있다. 혐오의 나쁜 생각을 갖고 회상하는 것[悔], 마음을 어둡게 하고 몸을 무겁게 하는 것[眠], 마음이 언어의 모습과 같은 영상을 따라 추종하고 찾아 헤매는 것[尋], 물질과 정신을 대상으로 보다 섬세하게 관찰하고 살피면서도 안정되지 못하는 것[伺]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유식학에서는 마음의 작용을 모두 51종으로 해석하고 있다. 51종의 작용은 팔식이 모두 야기하는 것이 아니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뢰야식은 다섯 가지 변행심소만을 야기하고 그 성질은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이다. 무부무기성은 아뢰야식 자체에는 번뇌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지혜와 불성을 장애하는 성질이 아닌 것이며, 선과 악의 성질이 아닌 무기(無記)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은 선업과 악업을 보존할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말나식은 변행심소 5종과 별경심소 가운데 혜(慧)심소와 수번뇌심소 가운데 혼침, 도거, 불신, 해태, 빙일, 실념, 산란, 부정지 등 8종의 심소와 아치, 아견, 아마, 아애 등 4종의 심소 등 18종의 심작용만을 야기한다. 이 말나식의 성직은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이라고 하는바 그것은 말나식의 번뇌가 항상 지혜를 장애하는 번뇌(所知障)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아(無我)의 진리를 망각한 아집(我執)과 진리의 법칙을 망각한 법집(法執)을 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불성에 발생하는 지혜를 부장(覆障)하는 번뇌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부장의 번뇌를 야기한다고 하더라도 그 번뇌가 미세하기 때문에 악업을 조성할 만큼 강한 작용은 아니라는 뜻에서 무기성이라고 한다.
 의식은 51종의 심작용을 모두 야기하며 그 성질은 선성과 악성 그리고 무기성 등 삼성(三性)의 작용을 항상 야기한다고 해서 선악무기성(善惡無記性)이라고 한다.
 오식은 51종의 심작용 가운데서 변행과 별경 등 34종의 작용만을 야기하며 그 성질은 선행과 악행 그리고 무기행 등 삼성의 행동을 야기한다.
 이상으로 심체와 심작용의 내용을 요약하여 살펴보았다. 모든 현상계는 이들 심체와 심작용에 의거하여 조성되며 인간의 정신생활도 이들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물질보다도 정신계가 우선하며 심작용보다도 심체가 우선하다는 뜻에서 유식이라는 말이 있게 되며 유식사상에 의거한 현상계의 정법순서를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첫째 심체[心體], 둘째 심작용[心所], 셋째 물질[色], 넷째 정신도 아니고 물질도 아닌 것[色心不相應行], 다섯째 불변의 진리[無爲] 등 오법(五法)의 순으로 정하고 있다. 이는 마음이 모든 것보다 우선하고 물질은 마음과 관계를 맺고 하나의 진리를 이루고는 있지만 인식의 대상이므로 오근(五根)과 오경(五境) 그리고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 등 11종을 합쳐서 세번째에 배정하였다.
 부상응행법(不相應行法)은 24종으로서 무상(無常)한 것과 윤회의 생명체 등 정신과 물질의 틈새에 형성된 법칙이므로 네번째에 배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위법(無爲法)은 6종으로서 정신과 물질의 본바탕인 진여성을 뜻하며, 진여성은 시작도 없고 종말도 없으며 생과 멸이 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만법의 진리로서 다섯번째에 배정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전사위법(前四位法)은 인연으로 형성된 변천의 현상계[有爲法]을 뜻하고 제오위의 무위법은 본래 청정하며 불변의 진리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인연법으로 이루어진 현상계를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하고 의타기성의 본성은 변화하지 않고 영원한 진리의 체성을 구족하고 있다는 뜻에서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지리로서 함께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범부들은 이를 망각하고 무명(無明)과 탐진치(貪瞋痴) 등 번뇌를 야기하여 악업을 짓게 되면 이를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고 한다. 변계소집성은 번뇌를 뜻하며 번뇌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수행하면 없어질 수 있다.
 유식사상은 팔식(八識)을 정화하여 지혜를 얻게 하는 데 있다. 이를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지혜의 증득은 안이비설신 등 오식이 정화되면 성소작지(成所作智)를 증득하고, 의식이 정화되면 묘관찰지(妙觀察智)를 증득하며, 말나식이 정화되면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증득하고, 아뢰야식이 정화되면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증득하게 된다.
 이와 같이 팔식이 정화되면 사지를 증득하게 된다. 이는 자신만을 고집한 아집(我執)의 마음을 비우는 아공관(我空觀)의 경지이다. 그리고 사물과 현상계의 모든 것은 인연의 집합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망각하고 집착하여 탐욕을 발생하는 법집(法執)의 마음을 비우는 법공관(法空觀)의 경지를 말한다. 이와 같은 아공과 법공은 곧 말나식과 의식의 아집과 법집의 번뇌를 정화하는 것이고 그 밖의 모든 번뇌도 함께 정화하게 된다.
 번뇌는 마음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마음을 정화하면 번뇌도 정화된다. 번뇌가 정화된다는 것은 번뇌 자체가 실체가 아니며, 가상의 생각에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실체가 없는 번뇌라 할지라도 마음이 자아의 모습[我相]과 삼라만상의 모습[法相]을 확고하게 집착하고 있는 한 쉽게 정화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먼저 자각을 야기하고 이타적인 보살의 수행을 하여야만 그 번뇌들이 정화될 수 있다.
 수행은 육바라밀(六婆羅密)을 수행하는 것으로서 육바라밀은 남에게 보시를 하고[布施],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하고 대중을 교화하는 계율을 지키고[持戒], 고난을 참고 진리를 탐구하며[忍辱], 진리를 깨닫고 중생을 구제하는 일에 용맹정진하고[精進], 번뇌를 없애고 마음을 안정하여[禪定], 번뇌를 퇴치하여 지혜를 밝게 하는 것[知慧]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은 수행은 반드시 마음이 번뇌가 정화되어 보리와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는 뜻에서 바라밀이라고 한다. 이러한 수행위(修行位)는 청정한 마음으로 청정한 업력을 쌓는 것으로 이를 인위(因位)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인위는 자량위(資糧位)·통달위(通達位)·수습위(修習位)·구경위(究竟位) 등 오위의 절차를 밟으며 수행하게 된다.
 이들 오위를 수행하는 기간은 삼겁을 수행해야 한다. 삼겁 동안 중생을 교화하고 고통을 없애주는 보살행을 수행하며 그 수행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정화되고 번뇌가 없어지며 정화된 마음에서는 지혜가 발생하고 고통이 없는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하여 유식실성인 마음의 진여(眞如)가 차별이 없는 평등의 진리를 구현하게 된다. 이와 같이 유식사상은 팔식의 상태를 설명하고 팔식을 정화하여 유식의 실성인 진여심을 발생케 하며 복덕과 지혜를 구족한 인격자를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참고문헌
「유식사상의 성립사」(오형근, 『승가』 2, 중앙승가대학, 1984)
「신라유식사상의 특성과 그 역사적 전개」(오형근, 『한국철학』 上, 1977)
「유식교학에서의 수행과 증과)」(오형근, 『불교학보』 12, 불교문화연구소, 1975)
「원측의 유식사상」(원의범, 『한국불교사상사』 제2편, 원광대학교 출판부, 1974)
「중국불교의 유식학설」(김동화, 『불교학보』 7, 불교문화연구소, 1970)
「대승론부상의 심식설」(김동화, 『불교학보』 6, 불교문화연구소, 1969)
 
밀교 密敎 
요약: 부처의 깨우친 진리를 직설적으로 은밀하게 표출시킨 대승불교의 한 교파.
개설 
 밀교는 대승불교의 한 분야로 7세기 경 인도에서 성립되었다. 밀교가 성립될 당시의 인도불교는 부파불교시대(소승불교시대)로서 실천보다는 전문적 이론과 승려중심의 경향이 매우 짙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흐름은 교학(敎學)의 찬란한 발전을 가져오는 장점도 있었지만, 많은 신도를 잃게 되고 교단의 위축을 스스로 가져오는 단점도 있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실천을 위주로 한 대중불교운동이 밀교이다.
 당시까지 발전되었던 불교사상의 두 주류인 중관학파(中觀學派)의 공사상(空思想)과 유가유식학파(瑜伽唯識學派)의 유사상(有思想)을 동시에 계승, 발전시키면서, 바라문교와 힌두교 및 민간신앙까지 폭넓게 받아들여, 그것을 다시 불교적으로 정립한 것이 밀교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밀교사상의 이론적 원리[敎相]를 밝힌 ≪대일경 大日經≫과 실천법의 체계를 세운 ≪금강정경 金剛頂經≫은 밀교의 근본경전들이다.
 이에 의하면 밀교는 법신불(法身佛)인 대일여래(大日如來)를 중심으로 한 태장계(胎藏界)와 금강계(金剛界)의 수행법을 닦아 익히면 이 육신 자체가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밀교의 수행자는 누구나 입으로 진언(眞言)을 염송하고 손으로 결인(結印)을 하며 마음으로 대일여래를 생각하는, 신구의(身口意)의 삼밀가지(三密加持)를 행하여 중생의 삼밀과 부처님의 삼밀이 서로 감응일치하여 현생에서 성불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근본경전을 중심으로 조직된 밀교가 성립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대일경≫과 ≪금강정경≫이 성립되기 이전의 밀교사상을 ‘잡밀(雜密)’이라고 하고, 그 이후의 것을 ‘순밀(純密)’이라고 하여 구별하였다. 이러한 인도밀교의 두 형태 가운데서 중국에 먼저 전래된 것은 잡밀계통이다.
 동진의 원제(元帝) 5년(322) 최초로 전래된 뒤 잡밀계통의 경전인 ≪대공작왕신주경 大孔雀王神呪經≫·≪관정경 灌頂經≫ 등이 번역되면서 차차 전파되었다. 725년 선무외(善無畏)가 ≪대일경≫을 번역하고, 753년 불공(不空)이 ≪금강정경≫을 번역하여 밀교의 정통사상인 순밀이 중국에 전래되었다.
 그 뒤, 밀교는 송나라 때까지 크게 발전하여 깊은 신앙의 의지처가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잡밀계통의 중국밀교를 삼국시대부터 수용하게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밀교에 대해서는 그 자료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신라에서는 7세기 초부터 잡밀계통이 전래되었고, 8세기에 접어들면서 순밀계통이 전해지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밀교는 고려나 조선시대까지 민중신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밀교는 이론이나 교학적인 발전보다는 실천적 수행면에 치중되었으며, 독자적인 발전보다는 선(禪)이나 정토신앙 또는 천태종(天台宗) 등과 밀접한 관계성 속에서의 발전을 보았다.
 특히, 고려 이후부터는 여러 가지 의식이나 진언염송을 통한 밀교신앙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우리 나라에서의 밀교는 신라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성취를 위한 목적보다는 세간적 성취를 위하여, 전쟁방지 및 병의 치료와 같은 목적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
 
신라 
 1. 밀교 승려들의 활약과 전래교법 
신라에 최초로 밀교를 전한 승려는 안홍(安弘)이다. 그는 600년(진평왕 22) 혜숙(惠宿)과 함께 중국으로 가서 서역승(西域僧) 세 사람, 중국승려 두 사람을 데리고 귀국하여 황룡사(皇龍寺)에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 栴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하고, 640년(선덕여왕 9) 만선도량(萬善道場)을 회향하였다.
 안홍과 거의 같은 시기의 밀교승으로는 명랑(明朗)이 있다. 명랑은 632년 당나라로 가서 3년 동안 밀교를 공부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한 뒤 자신의 집을 금광사(金光寺)로 고쳐 짓고 이곳을 중심으로 밀교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안홍과 명랑을 기점으로 하여 명효(明曉) 등은 잡밀계통을 받아들였고 혜통(惠通)은 처음으로 순밀사상을 전래시켰다.
 혜통에 이어 현초(玄超)·의림(義林)·혜일(惠日)과 같은 밀교승려들의 활약으로 신라밀교는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의 밀교사상도 신인비법(神印祕法)·사리탑(舍利塔)·오대산신앙(五臺山信仰)·소재활동(消災活動:재앙을 없앰) 등을 통하여 활발히 전개되었다.
 신라 신인비법은 명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명랑이 금광사를 중심으로 밀교신앙을 활발히 전개시키고 있었던 668년(문무왕 8)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하자, 문무왕은 명랑에게 이를 물리쳐줄 것을 부탁했다.
 명랑은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다 임시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어서 비법에 밝은 12명의 승려와 더불어 신인비법을 행하여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이러한 명랑의 신인비법은 그 수용 초기부터 호국이념과 연결되면서 대단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 법맥은 안혜(安惠)·낭융(狼融)·광학(廣學)·대연(大緣) 등으로 계승되어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신인비법은 원래 문두루법(文豆婁法, Mudra)으로서 그 사상은 ≪관정경≫ 제7권에 의한 것이다.
 이 경은 주로 제석천(帝釋天)과 사천왕(四天王)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과 그 나라가 어려울 때 신인비법으로써 구제될 수 있는 방법과 내용이 제시되어 있다.
 부처님의 제자들 중 사악한 귀신 때문에 공포에 떠는 사람이 있거나, 병에 걸려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다른 나라가 침략을 할 때는 마땅히 오방신상을 만들어 문두루법을 행하면 모든 재난을 극복하여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개인과 국가적 재난이 문두루법을 행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근거는 이들 5방의 신장이 각각 7만의 부하신을 거느리고 문두루법을 행하는 목적에 부응하여 보호해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신인비법은 ≪관정경≫에서 사상적·의례적인 연원을 찾을 수 있지만, 신라의 신인비법은 ≪관정경≫ 사상을 주축으로 하면서, 그 위에 ≪관불삼매해경 觀佛三昧海經≫과 ≪금광명경 金光明經≫의 사상까지도 폭넓게 수용하였다.
 
따라서, 신라 신인비법의 사상은 독자성을 가지고 발전하면서도 용이나 사천왕, 제석천 등의 사상을 무리 없이 포섭하게 되었고, 그러한 현상은 소재활동과 짝하여 신라밀교가 무속신앙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결과가 되었다.
 
이와 같은 명랑의 신인비법을 중심으로 한 밀교의식은 고려시대에 가서 신인종(神印宗)이 성립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또한 혜통이 진언을 외워 신문왕의 등창을 낫게 함으로써 성립된 일맥은 고려시대에 와서 총지종(摠持宗)으로 성립되었다.
 
그러므로 명랑을 신인종의 초조(初祖)로, 혜통을 총지종의 초조로 삼고 있다. 이 밖에도 의림은 805년(애장왕 6) 103세의 나이로 밀교의 전교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는 주로 순밀계통의 태장계법과 금강계법을 위주로 하였다.
 
2. 오대산신앙(五臺山信仰)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신앙운동은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그것은 당나라의 오대산신앙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자장 당시는 오대산신앙이 크게 발전하였거나 체계화되지는 못하였다.
 
신라에서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 본격화된 것은 8세기 초 정신대왕(淨神大王)과 그의 태자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에 의해서였다.
 
이들 세 부자가 오대산신앙을 전개한 사실은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조(臺山五萬眞身條)와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에 전해지고 있다. 이에 의하면 보천과 효명은 오대산에 들어가 수양을 하였다.
 
하루는 산의 다섯 봉우리를 보려고 산에 올랐더니 동쪽 봉우리에서는 1만의 관음보살이, 남쪽 봉우리에서는 1만의 지장보살이, 서쪽 봉우리에서는 아미타불을 수위(首位)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북쪽 봉우리에서는 석가모니불을 수위로 500의 아라한(阿羅漢)이, 중앙에서는 비로자나(毘盧遮那)를 수위로 1만의 문수보살이 각각 나타났으므로 예배를 올렸다.
 
그 뒤, 보천태자만이 오대산에 계속 남아 ≪수구즉득다라니경 隨求卽得陀羅尼經≫을 매일 염송하면서 50년을 수양하였다. 이러한 보천이 말년 나라를 지키고 이익하게 할 비법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동쪽 봉우리에는 관음방(觀音房)을 두어 관음상과 푸른 바탕에 1만의 관음상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福田)을 두어 낮에는 ≪금광명경≫과 ≪인왕반야경 仁王般若經≫ 및 천수주(千手呪)를 외우게 하며, 밤에는 관음예참(觀音禮懺)을 염송하게 하고, 원통사(圓通社)라고 이름하게 하였다.
 
남쪽 봉우리에는 지장방(地藏房)을 두고, 지장보살상과 붉은 바탕에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수위로 1만의 지장보살상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지장경≫과 ≪금강반야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점찰예참(占察禮懺)을 행하게 하고, 금강사(金剛社)라고 이름하게 하였다.
 
서대(西臺)에는 미타방(彌陀房)을 두어, 무량수불상(無量壽佛像)과 흰 바탕에 무량수불을 수위로 1만의 대세지보살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법화경≫을 읽고 밤에는 미타예참(彌陀禮懺)을 행하게 하고, 수정사(水精社)라고 이름하게 하였다.
 
북대(北臺)에는 나한당(羅漢堂)을 두어 석가상을 모시고, 검은 바탕에 500나한상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불보은경 佛報恩經≫과 ≪열반경≫을 읽고, 밤에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행하게 하고, 백련사(白蓮社)라 이름하게 하였다.
 
중앙은 진여원(眞如院)으로 문수상을 진흙으로 만들어 모시고 그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비로자나를 수위로 하여 36화형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화엄경≫과 600권 ≪반야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하여, 화엄사(華嚴社)라 이름하게 하였다.
 
이러한 오대산이라는 지역을 상징하여 5색·5방·5불로 체계화한 구조와 사상의 내용은 밀교의 본지수적(本地垂適)과 만다라(曼茶羅)에 근원을 두고 있다. 신라의 오대산신앙은 자장에 의하여 당나라 신앙 형태에 영향을 입어 시작된 것이다.
 
중국의 오대산신앙이 시작된 교리적 근거는 60권 ≪화엄경≫의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 제27과 ≪문수사리법보장다라니경 文殊舍利法寶藏陀羅尼經≫의 교설에서부터 출발되었다.
 
그러므로 신라 오대산신앙의 중앙에는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이 위치하게 되는데 이것은 중국이나 신라의 오대산신앙이 그 출발부터가 현교(顯敎)와 밀교의 융합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8세기 초 중국에서는 선무외·금강지(金剛智) 등이 중심이 되어 천수관음조상법(千手觀音造像法)·지장화상법 등을 정립하여 밀교적인 관음과 지장신앙을 전개하였고, 또한 불공(不空)은 함광(含光)과 더불어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밀교적 문수신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이러한 시기에 신라에서는 명효와 의림 등의 훌륭한 밀교승들이 있어서 당나라의 그러한 교법을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때이다.
 
보천이 신라 오대산신앙을 체계화한 것도 8세기 중엽이었다. 그는 철저한 밀교의 진언승(眞言僧)이어서 수구다라니를 매일 염송하였고, 토속신(土俗神)이 와서 보천에게 수계까지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물론 민속신앙이 밀교에 포섭되는 한 실례이기도 하지만, 보천은 문수보살로부터 관수까지 받을 정도로 밀교신앙에 철저하였다.
 
따라서, 보천에 의해서 체계화된 신라 오대산신앙이 밀교적으로 전개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십일면관음이나 천수천비(千手千臂)의 관음은 모두가 밀교적인 것이다.
 
이러한 관음을 염송하는 천수주가 ≪인왕경≫과 함께 관음방에서 독송된 것이나, 5방에 5불을 배치하고 다섯가지 색을 배대하여 5원(員)의 복전을 둔 것은 모두가 순연한 밀교적 수행법의 하나요, 신라 특유의 만다라적 체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방불(五方佛)의 배치법은 현교나 밀교의 전통적 만다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라 특유의 것이다. 따라서 오대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앙운동은 신라밀교만이 발전시킬 수 있었던 새로운 만다라라고 할 수 있다.
 
3. 사리탑신앙(舍利塔信仰) 
 
신라시대 사리탑에 대한 신앙이 처음으로 밀교사상과 만나게 되는 것은 706년(성덕왕 5)이다. 이 해 신문왕과 효소왕의 명복을 빌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경주 황복사(皇福寺)에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탑의 이층에다 부처의 사리와 함께 ≪무구정광다라니경≫을 봉안하였다.
 
≪무구정광다라니경≫은 작은 탑 99개 또는 77개를 조성할 것과 이 다라니의 공덕을 교설한 잡밀계통의 경이다. 이 경은 중국에서 695∼704년 사이에 미타산(彌陀山)이 번역하였고, 이 시기에 당나라에서 총지법(摠持法)을 공부하고 귀국한 명효가 ≪불공견색다라니경≫과 함께 신라로 가지고 왔다.
 
그 뒤부터 신라에서는 ≪무구정광다라니경≫을 조탑경(造塔經)으로 널리 받들어서 중요한 탑 속에는 반드시 이 경이 봉안되었다. 751년(경덕왕 10) 불국사의 석가탑을 보수하면서 이 경을 넣었고, 855년(문성왕 17) 경주창림사(昌林寺) 삼층석탑에도 이 경이 봉안되었다.
 
828년(흥덕왕 3)에 세워진 경상북도 영일군법광사(法光寺)의 삼층석탑에서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가 새겨진 사리병이 봉안되었는데, 이는 신라 사리탑신앙이 다른 밀교경전과도 연결을 맺은 좋은 예이며, 9세기로 접어들면서 그러한 현상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863년(경문왕 3)에 건립된 동화사 비로암(毘盧庵)의 석탑에는 사리장치와 함께 금동사방불함(金銅四方佛函)이 봉안되었는데, 이것은 태장계와 금강계, 잡밀과 순밀, 현교와 밀교가 융합된 삼종실지(三種悉地)의 만다라사상을 사리탑신앙으로 응용, 발전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비로암의 석탑을 계기로 신라 사리탑신앙은 점차 풍부한 밀교적 사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화사 금당암(金堂庵) 삼층석탑과 봉화군 서동리 동쪽의 삼층석탑, 봉화군 취서사(鷲棲寺)의 석탑 등은 모두가 ≪무구정광다라니경≫과 삼종실지의 만다라사상에 근거하여 건립하였다.
 
특히, 취서사 석탑의 경우 무구정광단(無垢淨光壇)을 건립하고 밀교적 의식까지 거행하였으며, 871년에 중수한 황룡사구층탑에는 99기의 작은 탑과 함께 사리·다라니경 등을 봉안하였다.
 
또한, 895년(진성여왕 9) 백성산사(百城山寺)에서는 길상탑(吉祥塔)을 세우면서, ≪법화경≫·≪금강반야경≫·≪금광명경≫·≪진언집 眞言集≫·≪무구정광다라니경≫과 함께 77기, 99기의 작은 탑도 봉안하였다. 이 때 특히 77기, 99기의 작은 탑을 봉안하면서 그 각각의 탑 속에 진언을 또 봉안하였다.
 
이러한 백성산사의 길상탑을 통하여 신라의 현교와 밀교는 자연스럽게 융합됨은 물론, 그 사상면에 있어서도 더욱 깊고 넓은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고려 
 
1. 왕실의 밀교신앙과 보호정책 
 
고려는 나라를 세울 당시부터 밀교에 대한 신앙과 관심이 매우 깊었다. 밀교를 포함한 불교사상을 고려에서는 건국이념으로 하였고, 밀교적 수행의식을 진호국가(鎭護國家)의 한 법용(法用:정례화된 의식)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므로 고려에서의 밀교는 왕실을 중심으로 그 초기적 신앙의 전통이 확립되었고, 역대 왕들은 그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밀교신앙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철저한 호불왕(護佛王)으로서, 특히 밀교신앙과 밀교계통의 승려들로부터 정신적·현실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밀교신앙의 전개와 보호에도 대단한 힘을 기울였다.
 
태조의 불교에 대한 신앙의 경향은 <훈요십조 訓要十條>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제2조와 제6조에서 유일하게 도선(道詵)을 거론하였고,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이처럼 태조가 팔관회·연등회와 도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특별히 후대 왕들에게까지 유촉함으로서 원래의 연등회와 팔관회는 고려에 이르러 밀교성이 짙게 가미된 불교의식으로 탈바꿈되었다. 도선의 사상에 대해서도 음양오행(陰陽五行)이나 도참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실제로 도선의 사상적 연원과 근저는 밀교에 있었다.
 
따라서, 태조가 훈요 중에서 도선을 내세우고 연등회와 팔관회를 중요시하였던 것은 그의 밀교에 대한 신앙심이 돈독하였던 것이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태조는 즉위한 이듬해 개경에다 10개의 사찰을 세우면서 그 수사찰(首寺刹)인 법왕사(法王寺)의 주불로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또 태조가 개인적으로 신앙이나 나라를 세움에 있어서 밀교적 감화력을 크게 입은 고승으로서는 광학과 대연이 있다.
 
광학과 대연은 신라 명랑의 법을 이어받은 밀교의 대덕들로서, 문두루법으로 태조의 건국을 도왔다. 태조는 광학·대연과의 이러한 인연을 계기로 하여 936년(태조 19) 현성사(現聖寺)를 창건하여 신인종의 근본도량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938년에는 인도의 승려인 홍범실리박일라(弘梵室哩縛日羅)가 ≪갈마단경 羯磨壇經≫을 가지고 왔을 때 왕이 양가(兩街:불교 업무를 관장하던 僧錄司의 2개 부서)로 하여금 위의를 갖추고 맞이하게 한 것도 밀교에 대한 깊은 신앙심에서 연유된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에서의 밀교는 위정자들의 돈독한 신앙심과 보호정책에 힘입어 초기부터 굳건한 전통의 기반이 확립되어 뒷날 역대 왕들에게 계승되어 발전적인 밀교신앙의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목종은 1007년(목종 10) 총지사(摠持寺)의 주지 홍철(弘哲)로 하여금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 一切如來心祕密全身舍利寶篋印陀羅尼經≫을 총지사에서 개판하여 널리 보급하게 하였다.
 
목종이 이 경을 개판한 것은 “만약 이 경을 개판하여 탑 속에 봉안하게 되면 모든 재난이 소멸하게 된다.”는 사상에 근거하여, 나라의 태평과 국민의 안녕을 도모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또한 모든 국력을 기울여 이루어진 초조(初彫)와 재조 고려대장경에도 밀교의 경전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현종 때 착수하여 문종 때 완성된 첫번째 대장경은 몽고병란 때 불타버렸으므로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현재 초조장경의 것으로 확인된 몇 권의 남은 책 속에는 ≪무량문파마다라니경 無量門破魔陀羅尼經≫·≪성지세다라니경 聖持世陀羅尼經≫ 등 24권의 밀교경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초조장경에도 밀교에 관한 전적들이 많이 들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수기(守其)가 찬술한 고려 재조대장경의 ≪대장목록 大藏目錄≫에 의하면, ≪대비로자나경≫ 7권, ≪금강정경≫ 3권 등 순밀교에만 해당되는 경전이 191종 356권이 들어 있고, ≪금강정유가호마의 金剛頂瑜伽護摩儀≫ 1권, ≪불정존승다라니염송의궤 佛頂尊勝陀羅尼念誦儀軌≫ 1권 등을 비롯한 밀교의식의 작법(作法)에 관한 것도 20종 21권이나 들어 있다.
 
그리고 충렬왕은 1275년(충렬왕 1) 왕실의 발원으로 ≪불공견색신변진언경≫ 30권을 은자(銀字)로 각판하여 현재 그 제13권이 가장 오래된 은자경(銀字經)으로 남아 있다. 1328년(충숙왕 15) 5월 충숙왕은 밀교대장경(密敎大藏經) 130권을 금서(金書)로 간행하여 세상에 펴내기도 하였다.
 
충숙왕은 호불왕으로서 특히 밀교에 대한 신앙이 매우 철저하였던 왕이다. 그러므로 그는 앞서 이루어진 밀교대장경 90권과 아직 정리되지 못한 40권을 다시 구하여 130권이나 되는 밀교대장경을 금서로 펴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 왕실이 국력을 기울여 밀교신앙의 기초가 되는 전적들을 수집, 정리, 간행한 것은 모두가 밀교에 대한 깊은 관심과 돈독한 신앙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 역대왕실과 위정자들의 밀교에 대한 신앙의 실천적 모습은 여러 종류의 도량과 의식을 통하여 잘 나타나 있다.
 
고려시대는 80여 종류의 법회(法會)·설재(設齋)·도량 등의 불교의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들 중 문두루도량·인왕도량·공작명왕도량(孔雀明王道場)·무능승도량(無能勝道場)·금광명도량(金光明道場)·소재도량(消災道場)·대일왕도량(大日王道場)·공덕천도량(功德天道場)·관정도량(灌頂道場)·만다라도량(曼茶羅道場)·제석천도량(帝釋天道場)·진언법석(眞言法席) 등과 같이 순수한 밀교의식이 매우 많았다.
 
또한 전적 자체는 밀교의 것이 아니지만 장경도량(藏經道場)·능엄도량(楞嚴道場) 등과 같이 밀교성이 매우 강한 의식들도 아주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행사와 의식들이 역대왕실을 중심으로 매년 매월 거행되지 않은 때가 거의 없었다.
 
특히, 밀교에 대한 신앙이 더욱 극진하였던 후대의 왕들 중 그 즉위식까지도 밀교의식의 전통적 방법에 따라 거행한 경우도 있었다. 강종·원종·충렬왕·충선왕은 모두가 관정의식(灌頂儀式)에 따라 왕위에 올랐던 왕들이다.
 
이 관정의식은 밀교의 독특한 것으로서, 원래 인도에서 국왕이 즉위할 때 보병(寶甁)에 네 바닷물을 넣어 그것을 왕의 정수리에다 뿌리는 의식에서 채용, 표방된 것이다.
 
밀교에서는 보병에 오지법수(五智法水)를 넣어 스승인 아사리(阿闍梨)가 제자의 머리에 그것을 뿌려줌으로써 오랜 옛날부터 지어온 무명(無明)의 때를 씻고 자기의 성품(自性淸淨心)을 깨달아 진리의 왕이 되게 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고려 후기의 왕들이 관정법에 따라 왕위에 오름으로써 그들은 세속적인 왕의 지위를 넘어 출세간적인 진리의 왕이 되고자 하였던 강렬한 신앙과 염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총지종(摠持宗)과 신인종(神印宗) 
 
우리나라의 밀교사상이나 그 신앙의 형태로는 두 가지의 큰 조류가 있었다. 명랑을 효시로 한 신인(神印)의 작법계통(作法系統)과, 혜통으로부터 시작된 진언지송(眞言持誦)의 총지법이 그것인데 이들이 하나의 종파로 각각 성립된 것은 고려시대의 일이다.
 
원래 총지라는 말은 다라니를 뜻으로 번역한 데서 유래한다. 우리 나라에 총지법이 최초로 전래, 수용된 것은 신라 혜통이 처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총지종의 성립을 신라시대로 보고, 그 개종조를 혜통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총지종이 성립되었다는 결정적 기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한 백두항룡(白豆降龍)이나 병고치는 법(愈疾法)이 순밀의 총지법보다는 잡밀적 성격이 매우 짙다. 따라서 혜통은 우리 나라에 총지법의 최초 전래자로 총지종의 원조(遠祖)는 될지언정, 그 개종조는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신라시대의 총지암(摠持嵒)은 신문왕과 효소왕 때에 창건된 절인데, 고려에 와서 총지사가 되었다. 이 절에서는 1007년 ≪보협인다라니경≫이 개판되었고, 1186년(명종 16) 불정소재도량(佛頂消災道場)의 밀교의식이 거행되었다.
 
또한 1275년 왕실의 발원으로 ≪불공견삭신변진언경 不空羂索神變眞言經≫ 30권을 은자로 찍어낸 것은 모두가 고려 왕실이 다라니의 수행을 존중하였던 좋은 예들이다.
 
또 1157년(의종 11) 총지사의 주지가 된 회정(懷正)은 주금사(呪噤師)로서 왕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았다. 그리하여 당시에 승직(僧職)과 상(賞)을 구하려는 모든 승려들은 그를 통하지 않을 수 없는 높은 권좌에 있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그가 의종의 총애를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유일한 주금사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금사라는 말은 경전에서 주력승(呪力僧)을 대력주사(大力呪師)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지만 이러한 대력주사가 의업(醫業)에 종사하면 이를 고려에서는 주금사라고 하였다.
 
고려에서는 이외에도 충숙왕 때의 복산(福山), 충혜왕 때의 학선(翯仙)·천기(天其) 등을 비롯하여, 문종 때 전의시(典醫侍)에 종사한 종9품의 주금박사(呪噤博士)·주금사·주금공(呪噤工) 등 많은 밀교 계통의 주사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36년(인종 14) 고시의 방법도 의업식과 주금식으로 나누어 실시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주금업에 종사한 총지주사는 물론, 밀교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도 교단 안팎에서 점점 확고한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조류에 짝하여 13세기경 조유(祖猷)·혜영(慧永)과 같은 대아사리가 배출되었으며, 이때부터 강종을 시작으로 하여 모든 왕의 즉위식 때는 반드시 관정의식을 행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종은 혈구산(穴口山)이 대일왕(大日王)의 상주처라는 백승현(白勝賢)의 말에 따라 이곳에다 혈구사를 지었으며, 꿈에 늙은 비구로부터 ≪대일경≫을 권념(勸念)하라는 지시를 받을 정도로 총지법에 대한 신앙이 철저하였던 왕이다. 이와 같은 상황과 여건으로 총지종은 고려 의종에서 고종 21년(1234) 사이에 개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신인종의 신인이란 ‘문두루’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결인(結印)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것은 신라 문무왕 때의 명랑이 이 법으로써 당나라 병사를 물리친 것이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이 된다.
 
그러므로 총지종과 마찬가지로, 신라시대에 신인종이 성립되었고 그 개종조 역시 명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신라시대는 아직 어떠한 종파도 성립된 일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이 기사를 전하고 있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면,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당시 해적이 침략해오자 신인조사(神印祖師) 명랑의 후예인 광학과 대연 두 대덕을 청하여 이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태조는 태조 19년(936) 현성사를 세워 신인종의 근저가 되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신인종은 936년 그 중심사찰인 현성사가 창건되는 것을 계기로 하여 개종되었다고 하겠다.
 
이 종파는 국난타개라는 신라적 전통을 유지, 계승하면서 그 신앙은 고려일대를 통하여 계속 발전하였다.
 
1047년(문종 1) 7월 동경(東京 : 경주)의 사천왕사에서 적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27일 동안 개설한 문두루도량을 위시하여, 숙종 6년(1101) 4월과 예종 3년(1108) 7월 진정사(鎭靜寺)에서, 예종 4년 4월 흥복사(興福寺)·영명사(永明寺)·장경사(長慶寺)·금강사(金剛寺)에서, 고종 4년(1217) 4월과 12월 현성사에서 각각 문두루도량을 개설한 사실이 ≪고려사≫에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의 신인종과 그에 대한 신앙이 계속 유지, 발전되어왔음을 입증하는 좋은 자료가 되거니와, 역대의 많은 왕들이 신인종의 근본도량인 현성사를 많이 찾았음도 이러한 사실과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1130년(인종 8) 4월 나라의 대신들이 경비를 모아 현성사와 영통사(靈通寺)에서 의식을 베풀고 나라를 위하여 복을 빌었다. 이 뒤를 이어 명종·고종·원종·충렬왕·충숙왕·공민왕 등이 현성사를 찾아 의식을 거행하였던 것은 모두가 문두루도량과 간접·직접으로 많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왕실을 중심으로 신인비법에 깊은 신앙과 많은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국난타개의 최고비법으로 믿고 있었다.
 
3. 밀교의식과 행사 
 
고려시대에 행하여진 밀교의 행사로는 상당히 많은 종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인왕도량은 제일 많이 행하여졌으며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인왕도량은 백고좌도량(百高座道場)·백좌도량 등 여러 가지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가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 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의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점에서는 같은 것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인왕경≫에는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구역본과 불공이 번역한 신역본이 있는데, 고려에서 주로 사용한 것은 불공이 번역한 신역본이다.
 
이 ≪인왕경≫을 고려에서는 나라를 보호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최승의 법으로 신앙하였다. 특히 ≪인왕경≫ 제5 호국품(護國品)의 교설을 근거로 하여 역대 왕들은 많은 인왕도량을 개설하여 나라와 국민의 안녕을 부처님께 빌었다.
 
≪고려사≫ 세가편(世家篇)만 보아도 1012년(현종 3) 5월 내전에서 ≪인왕경≫을 강설한 것을 비롯하여 1373년(공민왕 22) 4월까지 무려 122회나 인왕경의식이 거행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인왕도량이었다.
 
특히 1020년(현종 11) 5월의 기사에서 “내정(內庭)에 100개의 사자좌를 마련하고 3일 동안 인왕경을 강설하였으며, 그것을 매년 상례로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고려 인왕경 의식의 시행횟수는 122회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많은 ≪인왕경≫ 의식이 국가적 행사로 개설되었던 것은 인왕경을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이며, 나라를 지키는 최고의 법(求世之良藥 護國之勝門)”으로 믿고, 그러한 신앙을 바탕으로 인왕도량을 개설함으로써 국가 사회의 여러가지 환란을 극복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왕경신앙이 왕실을 중심으로 한 궁중이나 사원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장안에서는 경행(經行)이라 하여 국민들의 이익과 복을 기원하는 행사로 ≪인왕경≫을 받들어 모시고 보행독송(步行讀誦)하는 의식이 1046년(정종 12)부터 매년 정기적으로 행하여졌다.
 
이 경행은 고려 인왕경신앙의 특유한 모습으로서, 그것이 일반농민들과 같은 서민층에서는 행독(行讀)이라는 의식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즉, 시골의 농민들은 천재지변이나 기타 우환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인왕경≫을 받들어 모시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이 경을 독송하여 모든 재난이 물러가고 복이 오기를 기원하였다.
 
이와 같은 행독이나 경행의식은 모두 인왕도량과 그 사상적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승려와 속인은 물론, 왕실과 촌민(村民)에 이르기까지 ≪인왕경≫에 대한 신앙이 가장 열렬하였다.
 
더욱이, 그러한 신앙이 불공의 번역본을 근본으로 하였으며, 밀교적 의식법에 따라 전개되었던 점에서 인왕도량을 통하여 고려 밀교의 발전적 모습의 일단을 찾아볼 수가 있다.
 
고려에서 인왕도량 다음으로 널리 행하여졌던 밀교의식은 금광명도량이다. 금광명도량이 주로 나라 안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널리 행하였던 의식이라고 한다면, 인왕도량은 주로 군사적인 목적에서 나라 밖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목적을 띠고 개설된 금광명도량은 ≪금광명최승왕경 金光明最勝王經≫을 근본으로 삼아 개설한 도량으로, 고려에서는 금광명경도량(金光明經道場)·금광경도량(金光經道場)·금경도량(金經道場) 등으로 불렸다.
 
그리하여 1041년(정종 7) 5월부터 1389년(공양왕 즉위년) 9월까지 금광경의 도량의식이 모두 37회나 개설되었다. ≪금광명경≫의 사상에서 유래된 밀교의식으로는 금광명도량 외에도 공덕천도량과 사천왕도량(四天王道場)이 있다.
 
공덕천도량은 ≪금광명경≫ 권6 공덕천품(功德天品) 제13에 사상적 근거를 둔 것으로, 인간사회에 복과 재물을 키워준다는 데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고려에서는 이러한 도량들이 많이 개설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에서는 밀교도량으로 소재도량이 있었다. 물론, 고려시대에 행하여진 80여 종류의 의식들이 모두가 소재(消災)의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소재도량은 ≪불설치성광대위덕소재길상다라니경 佛說熾盛光大威德消災吉祥陀羅尼經≫과 ≪불설대위덕금륜불정치성광여래소제일체재난다라니경 佛說大威德金輪佛頂熾盛光如來消除一切災難陀羅尼經≫에 의거하고 있다.
 
이 밖에도 밀교관계 도량으로는 1367년 6월에 개설된 진언법석과 1264년(원종 5) 6월의 대일왕도량, 1110년 4월의 공작명왕도량 등이 개설됨으로써 고려에서의 밀교에 대한 신앙의 내용이 더욱 풍부하고 발전을 보게 되었다.
 
 
조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그 후대 왕들은 정책적 이념으로 숭유배불정책(崇儒排佛政策)을 표방하여, 불교를 탄압, 종단을 통폐합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의 신인종과 총지종도 1407년(태종 7) 11종을 7종으로 폐합하면서 총지종과 남산종(南山宗)을 합하여 총남종(摠南宗)이 되게 하고, 중도종(中道宗)과 신인종을 합하여 중신종(中神宗)이 되게 하였다.
 
또 1424년(세종 6) 태종 이후 7종이던 것을 다시 선교양종으로 폐합하게 되면서, 총남종은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선종(禪宗)으로 되고, 중신종은 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과 함께 교종(敎宗)으로 폐합되었다.
 
그리하여 밀교의 신인ㆍ총지의 양종은 그 명맥마저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태종은 1401년 궁중의 송주승(誦呪僧)을 파하였고, 1417년 ≪진언밀주경 眞言密呪經≫이나 ≪다라니집 陀羅尼集≫ 등 밀교관계 서적을 불살라버리게 하고 청우(請雨)나 시식수법(施食修法)에 관한 것들만 남겨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을 가하던 태종은 태조가 죽자 진언법석·화엄법석 등을 빈전(殯殿)과 각 사찰에서 개설하게 하였으며, 칠칠재(七七齋) 및 소상재(小祥齋)와 대상재(大祥齋)를 개설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부왕의 대사를 당하여 마음에 시비를 계교할 겨를이 없다.”는 정책적 명분론을 내세웠다. 따라서 태종이 밀교의 각종 서적을 불살랐던 것은 유교적 풍토에 따른 정책적인 조처에 불과하였으며, 그 내면의 신앙에는 밀교가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하겠다.
 
태조는 1393년 2월 숙위사졸(宿衛士卒)들에게 명하여 궁궐의 뜰에서 ≪신중경 神衆經≫ 소재주(消災呪)를 염송하게 하였으며, 그 재위연간 동안 밀교의 소재도량을 14회나 개설하였으며, 1395년 4월 총지사와 현성사에서 불사를 크게 일으키기도 하였다.
 
1400년(정종 2) 3월 정종은 현성사에서 문두루도량을 개설하였고, 세종은 1450년 1월 공작재(孔雀齋)를 개설하게 하고 ≪불정심다라니경≫을 개판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또 1451년(문종 1) 5월과 1457년(세조 3) 7월 공작재를 개설하였는데, 그것은 밀교계통의 ≪공작명왕경≫의 신앙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 일대를 통하여 많은 밀교관계 전적들이 개판되어 널리 신앙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개간된 밀교의 전적으로는 제일 먼저 ≪진언집≫을 들 수 있다.
 
≪오대진언 五大眞言≫은 42수진언(四十二手眞言)·신묘장구대다라니·수구즉득다라니·대불정다라니(大佛頂陀羅尼)·불정존승다라니 등을 한데 모은 것인데, 이것은 1458년(세조 4)과 1531년(중종 26), 1535년, 1634년(인조 12)에, 또 ≪천수경 千手經≫은 1476년(성종 7)과 1496년(연산군 2) 등 모두 8차에 걸쳐서 개판되었다.
 
≪제진언집 諸眞言集≫은 1569년(선조 2) 전라남도안심사(安心寺)에서 개간된 것을 비롯하여, 1658년(효종 9) 강원도신흥사(神興寺)에서, 1688년(숙종 14) 묘향산 불영대에서 개판되었으며, 1777년(정조 1)과 1800년에도 각각 개간되었다.
 
이 밖에도 1560년(명종 15) 장우사(藏于寺)에서 개판된 ≪성관자재구수육자선정 聖觀自在求修六字禪定≫ 1권, 1784년 불영산 수도암(修道庵)에서 개판된 ≪비밀교 祕密敎≫ 등 많은 밀교관계 전적들이 조선시대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개판되어 널리 사용되고 지송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종류의 진언집이나 밀교관계의 전적들이 종단폐합의 이전보다 그 이후에 더욱 많이 개판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조선시대에 있어서 밀교는 종단폐합이나 숭유배불이라는 정책과는 관계없이 왕실에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열렬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성 
 
우리 나라의 밀교는 그 발전된 내용면에서 몇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교리적인 측면에서의 발전보다는 실천면이 강조된 점이나, 실천에 있어서도 밀교 본래의 출세간적인 즉신성불의 목적보다는 병을 고치고 전쟁을 막는 등의 세간적 목적달성을 위하여 신앙되었던 점이 그것이다.
 
또 그러한 목적달성을 위하여 채용된 수행법이 신인비법이나 삼밀수행(三密修行)에서도 특히 진언지송(眞言持誦)만을 존중하여 신인종과 총지종이라는 종파를 형성하게 된 것도 그 특성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밀교의 더욱 두드러진 점은 밀교가 타종의 교학과 서로 밀접한 융합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제 그러한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밀교와 정토신앙 
 
(1) 밀교와 정토신앙
 
밀교와 미타정토(彌陀淨土)는 인도에서 대승불교운동의 양대소산으로서, 그 성립 당시부터 서로 무리없이 교섭될 수 있는 역사적 배경과 사상적인 조건 속에서 출발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 법화신앙과 미타신앙을 주축으로 하여 백련사(白蓮社)를 결사하고 천태종풍(天台宗風)을 크게 떨쳤던 요세(了世)는 매일의 일과로서 준제주송(准提呪誦) 1,000편과 미타염불 1만 번을 하여 수행을 하였다.
 
이러한 요세의 수행을 통하여 천태사상과 밀교와 정토신앙이 서로 무리없이 접근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 밀교의 진언과 정토의 염불이 외형적으로는 무리없는 접근으로 파악되지만, 그것이 개인적 깨달음의 내용에서는 접근이 아닌 원융성(圓融性)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요세가 진언염송과 미타염불을 통하여 수행일과를 하였다는 것은 밀교와 정토의 조화로운 융섭적 신앙(融攝的信仰)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려 밀교의 조류는 요세의 경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요세와 거의 같은 시대에 팔공산 거조사(居祖社)에 있었던 원참(元旵)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원참은 1298년 ≪현행서방경 現行西方經≫을 집록하여 미타정토의 왕생(往生)을 아미타본심미묘진언(阿彌陀本心微妙眞言)의 염송만으로 충분히 가능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리하여 고려나 조선에서는 밀교가 진언을 매체로 하여 정토신앙과의 상호교섭관계를 밀접하게 맺게 되었다. ≪현행서방경≫은 1448년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개간된 것을 비롯하여, 1531년 하동 쌍계사(雙磎寺), 1556년 황해도 신광사(神光寺), 1710년 하동 칠불암(七佛庵)에서 각각 개판되었다.
 
그리고 선사였던 석실(石室)은 실제로 이러한 신앙을 널리 펴는 데 힘을 기울였던 고승이다. 그리고 1668년(현종 9) 보현사(普賢寺)에서 개판된 ≪진언집≫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개판되어 널리 사용되었던 ≪염불작법 念佛作法≫·≪일용작관법 日用作觀法≫·≪비밀교≫ 등에는 무량수불설왕생정토주(無量壽佛說往生淨土呪)를 비롯하여 결정왕생정토진언(決定往生淨土眞言)·아미타불심주(阿彌陀佛心呪)·무량수여래근본다라니(無量壽如來根本陀羅尼)·무량수여래심주(無量壽如來心呪) 등 많은 정토관계의 진언이 있어 실제 의식상에 응용되고 있었다.
 
1644년 동래범어사(梵魚寺)에서 개판된 ≪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 佛頂心觀世音菩薩大陀羅尼經≫의 간기에서 ‘이 다라니법문은 수양의 미묘한 문이요, 정토왕생의 첩경’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에서의 밀교는 고려 말기부터 정토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것은 점점 시대가 흐름에 따라 개인의 신앙에서는 물론이요, 교학과 사상면에서도 서로가 깊은 융합적인 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정토신앙이 밀교화된 ≪현행서방경≫ 등이 저술되어 조선시대에 널리 신앙되었으며, 많은 밀교의식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불교의식에서도 밀교화된 정토관계 진언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밀교계의 현상은 한국의 밀교와 정토가 신앙·교학·사상·역사의 측면에서 원융한 습합을 이루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 밀교와 선 
 
밀교와 선 또한 정토와 마찬가지로 신라 말기부터 깊은 교섭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신라말 도선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동리산(桐裏山) 제2세로서 밀교의 여러가지 작법의식(作法儀式)을 선의 수행법에 응용하여 불교의 일반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고려의 요세는 매일의 일과에서 선을 하고 남은 시간에 진언지송과 미타염불을 하였거니와, 고려 말에는 선수행의 방편인 1,700공안(公案)이 모두 아자(阿字)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선과 밀교의 융섭은 조선시대에 와서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능엄경 楞嚴經≫은 ≪금강경≫과 더불어 선종의 소의(所依:한 종파의 근본을 이룸.)가 되는 경으로서, 이 경전에는 능엄주가 수록되어 있다.
 
1668년 묘향산 보현사에서 계정(戒淨)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모든 진언들을 모아 ≪진언집≫을 간행하였는데, 여기에 정본능엄주(正本楞嚴呪)가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능엄주는 선승들도 아침 저녁의 의식 때 염송하였으며, 밀교에서도 이 능엄주를 많이 지송하였다.
 
이처럼 선과 밀교가 서로 융섭된 관계로 발전하자, 휴정(休靜)은 선가의 의식집인 ≪운수단 雲水壇≫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선을 교설할 때의 의식집인 ≪설선의 說禪儀≫를 저술하여 밀교의 각종 의식법과 함께 필요한 진언까지도 적절히 도입하여 선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선과 밀교는 신라 말기부터 서로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러한 관계가 교학적이나 의식면은 물론, 신앙 속으로까지 융섭되어 어느 일면에서는 서로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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